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을 했으며, 직업 군인으로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같은 인연으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그런 토양에서 싹튼 대구에 대한 애정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눈에 뜨이지 않는 배려와 후원으로 나타났다.
태종학(太鍾鶴'1966년 5월 25일~1969년 10월 25일 재임) 시장 때의 이야기다.
그는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도시 건설 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노련한 행정가였던 전임 강계원(姜啓元'1964년 1월 11일∼1966년 5월 25일 재임) 시장이 세워 놓은 도시개발 기본계획을 손질하여, 동대구역을 신설함으로써 교통의 중심축을 대구역에서 동대구역으로 바꿔 놓았다. 또한 지금껏 보지 못했던 70m'50m'35m 폭의 넓은 도로를 종횡으로 신설 또는 확장하였다. 그리고 동부지구'신암지구'대명지구'성당지구'제3공업단지 등 약 1천520만㎡(약 460만 평)에 이르는 대대적인 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대대적인 도시개발 사업으로 해서 집이 헐리는 사람, 점포를 뜯기는 사람 등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지역개발 사업을 과감하게 시행함으로써 시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 같은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까지는 대통령의 배려와 후원이 있었다.
태종학 시장이 대통령에게 지역개발 계획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엇보다도 관심사는 중앙통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기존의 협소한 도로를 확장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개발 사업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그에 따른 보상 문제와 대구시의 재원 대책을 물었고, 자체의 재정 능력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였다. 대통령은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먼 장래를 생각할 때, 그보다는 동부지역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동부지구 개발계획을 마련하기에 이르렀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한 뒤 추진하였다. 동대구역을 신설하여 교통의 흐름을 동부지역으로 유도하는 한편, 지금껏 보지 못했던 넓은 도로를 신설하거나 확장하였다. 그와 함께 구획정리 사업을 통해 신시가지를 조성함으로써 도시 발전의 기반을 확충하였다.
김수학(金壽鶴'1969년 10월 25일~1972년 7월 1일 재임) 시장 때의 이야기다.
그는 성실하고 경험 많은 지방행정의 실무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전임 시장이 벌여 놓았던 건설 사업을 매듭짓는 한편, 그로 인한 과중한 부채를 상환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였다. 그와 함께 경부선 철도로 차단되었던 중앙통의 남북 소통을 위해 지하도를 개설하였다. 또한 도심에 자리 잡고 있던 저탄장을 반야월로 이전함으로써 공해 문제를 해소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1969년에 이르러 대구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도시의 성장과 인구 증가를 내다보며 주택 보급 계획을 마련하였고, 동인'신천'신암동의 시민 아파트, 그리고 효목동에 대단위 시범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주택 공급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 당시 대통령이 대구를 방문하면 수성관광호텔을 숙소로 이용하였다. 어느 날 아침, 대통령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허름한 건물과 논밭이 뒤섞여 있는 무질서한 수성들을 보고 시장에게 한마디 했다. "여기가 외국인들이 투숙하는 관광호텔인데, 저런 어지러운 시가지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종합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해서 도시의 모습을 일신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김수학 시장은 서둘러 수성들 일대의 개발계획을 마련하였다. 그에 따라 수성들 일대에 새로운 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그와 함께 상가가 형성되어 주변 환경이 크게 좋아졌다. 오늘날 '먹을거리 촌'으로 불리는 들안길 일대에 상가가 들어섰고, 주변에 있는 수성유원지와 어우러져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이 같은 드러나지 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 뒤 어느 날, 대구역 동쪽 태평로 일대에 형성되어 있던 사창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시장에게 "대구의 관문인데,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지" 하면서 은근하게 재개발을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 곧바로 사업계획이 마련되었고, 무질서한 기존의 건축물이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와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시가지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사창가도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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