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통] 두서 없던 젊은 날 같이 몽롱하던 '낮술'

입력 2011-04-07 10:07:47

독립영화 '낮술', 홀로 강원도 여행서 만난 이상한 경험

훤한 대낮에 마시는 낮술은 별난 느낌을 준다.

주위 눈이 있어 조심스럽게 시작하지만 술기운에 젖어 헤매다 보면 어느 새 만취해 비틀거리는 저녁을 맞게 한다. 작정한 술이 아니다보니 혈중 알코올농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마치 수술 중인 환자가 의식은 깨어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는 '수술 중 각성' 상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독립영화 '낮술'(노영석 감독)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다. 혼자 강원도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술과 함께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주 낯선 경험을 하는 영화다.

"술 한 잔 사 줘. 양주면 좋고." 술 사달라는 미모의 옆방 아가씨에 최면에 걸린 듯 허겁지겁 싸구려 양주를 사오지만, 그 아가씨는 냉큼 술만 마시고 남자친구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아니면 낮술 때문인지 마치 꿈을 꾼 듯 몽롱하다. '낮술'은 세파에 시달리고 나부끼는 젊은 청춘의 두서없는 삶이 너무나 아릿해 속이 쓰렸던 영화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낮술을 했다. 춥다가 갑자기 따스한 어느 토요일이었다. 고드름이 햇살에 녹아 촉촉하게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의 오후, 우리는 놋대접에 막걸리 잔술로 시작했다. 넉 잔의 막걸리가 이날따라 순식간에 비워지고, 채워지고, 또 비워졌다.

하나가 옛날 얘기를 꺼냈다. 그는 순수한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주로 그리는 화가다. 눈도 굵고 맑아 어두운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아이같이 순하고 착한 사나이다.

그런 그가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좀 엄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근근이 사는 형편에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술을 마시고 오면 화구를 마당에 내동댕이치기도 했고, 모진 말에 손찌검도 했다. 그림은 그리고 싶고, 아버지는 반대하고, 물감하나 살 돈도 없고…. 그러나 그는 반항은 물론이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니 뭐 될라꼬 카노. 옆 집 OO 봐라. 에라 이놈의 자식아!" 이 날도 그랬다. 맞다 못해 처음으로 방문을 박차고 집을 뛰쳐나왔다.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았다. 뒷산에 뛰어올라 시원하게 고함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있잖아. 내 소리 못 질렀다. 거기서도." "왜?" "나무가 있어서. 나무가 나를 보고 있어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미대 입학시험 치는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캄캄한 40리 길을 걸어 집에 가면서도 아버지가 살아있기를 빌었다. "지금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어." 에라 이~ 50살이 넘어서 한다는 소리가….

눈물로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에 우리는 핀잔을 줬다. 그가 즐겨 그리는 나무가 왜 그리 따뜻하고 아련한지 이날 낮술로 알게 됐다.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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