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뿌리로 신앙의 줄기로] (중)100년을 빛낸 주요 인물

입력 2011-04-05 07:19:11

교구장들 걸음 따라 교구 역사 한발 한발

(시리즈)천주교 대구대교구 100주년 두 번째

100년을 빛낸 주요 인물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역사는 교구장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를 시작으로 한 역대 교구장들은 시대의 부침 속에서도 대구대교구를 온몸으로 지탱해왔다. 드망즈 주교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도 착실히 대구대교구의 기초를 다졌고 최덕홍 주교와 서정길 대주교, 이문희 대주교 등은 대구대교구를 우리나라의 대표 교구로 성장시켰다. 역대 교구장들의 업적을 요약해봤다.

◆제1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1911~1938년), 제2대 교구장 무세 주교(1938~1942년)

1911년 6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여러모로 대구교구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주교관(1913년)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191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분원(1915년), 성모당(1918년) 등 학교와 교회 시설을 잇달아 지었다. 또 드망즈 주교는 출판물을 이용해 성직자와 신자들의 올바른 신앙생활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부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목 지침서'(1912년)와 평신자 지도자의 역할과 본분을 설명한 '회장의 본분'(1913년),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요약한 교리서(1931년) 등을 펴냈다. 1938년 드망즈 주교의 선종으로 교구장을 맡게 된 무세 주교는 일제의 강압과 통제 등으로 많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무세 주교 시절 (재)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이 설립돼 교회가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 소유의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제3대 교구장 하야사카 주교(1942~1946년), 제4대 교구장 주재용 신부(1946~1948년), 제5대 교구장 노기남 주교(1948년)

제3대 교구장을 맡은 하야사카 주교는 교구 성직자 중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교구장을 세우려는 일제의 강압으로 교구장을 맡은 하야사카 주교는 한국 성직자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고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선종한다. 뒤를 이어 교구장에 임명된 주재용 신부는 교육 사업에 특히 관심이 많아 대건중학교(1946년), 순심중학교(1946년), 성의학교(1947년) 등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주 신부는 1948년 건강상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했고 교구장이 없는 공백 사태를 메우기 위해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가 대구대교구의 교구장직을 겸임하게 된다.

◆제6대 교구장 최덕홍 주교(1949~1954년)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최덕홍 주교의 착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주교가 대구교구장을 겸임한 점을 고려하면 최 주교가 실질적으로 대구교구장을 맡은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되는 것이다. 또 서울에서 교육을 받은 이전 교구장들과 달리 최 주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1회 입학자로 대구에서 교육받은 교구장으로 지역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추진 방향도 잘 잡을 수 있었다. 6'25전쟁 때 대구교구는 당시 6개 교구 가운데 유일하게 북한군에 점령당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 주교는 한국 교회의 중심을 잡았다는 평을 받는다. 신부들이 군종으로 활동하도록 뒷받침해줬고 북한 지역에서 피신온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왜관에 자리 잡게 했다.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최 주교의 비서 신부가 바로 후에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 신부였다는 것이다.

◆제7대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1955~1986년)

1911년 대구교구 설정(4월 8일)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5월1일) 대구교구와 함께 성장했다. 1962년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바뀌면서 대구 최초의 대주교가 된다. 외국을 다니면서 원조 요청을 많이 했고 그 결과로 파티마병원 건립(1962년) 등 의료 사업의 기초를 다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레지오와 JOC(가톨릭노동청년회) 등 단체를 도입해 평신자 운동을 지원한다. 또 라틴어로 했던 미사를 우리말로 봉헌했으며 금전상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미사예물 공유제와 문서 사목 등의 기초를 닦았다. 인재 양성에 큰 뜻을 품어 6개 교구 연립 소신학교 개교와 산간학교 시작, 주일학교 교재 발간 등을 이룩했다. 평소 카리스마가 있고 강직했으며 혜안이 밝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1986~2007년)

이문희 대주교는 서정길 대주교 재임시 부좌주교로 있으면서 교구 사회복지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가톨릭대학병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 및 의료사업에도 역점을 두었다. 해외 선교에 눈을 돌려 중국과 러시아, 볼리비아 등에 신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1991년).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순교 신심을 진작하기 위해 관덕정 순교자 기념관 건립(1991년)과 한티 순교성지 개발(1991~2000년) 등을 추진했고 대구대교구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과 제1차 시노드 개최 등을 했으며 현재의 5개 대리구 체제를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도입했다. 이 대주교는 대구대교구를 지금의 모습으로 키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외유내강 스타일로 현대에 맞는 교회상을 설립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제9대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2007~2009년), 제10대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2010년~)

최영수 대주교는 대구대교구를 이끌기 위한 3대 기념사업을 추진하다 지병으로 선종하고 조환길 대주교가 그 뒤를 이어 대구대교구 100주년 경축대회위원회 및 실무위원회를 출범시키고 100주년 기념사업을 착실히 이끌고 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도움말:서준홍 신부

사진 제공 천주교 대구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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