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전복죽이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과음한 아들 녀석의 속을 달래주려고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찹쌀을 씻어서 불려 놓고, 전복을 손질했다. 전복 살은 얇은 놋숟가락을 사용하면 쉽게 껍질과 분리할 수 있다. 내장을 터트려서 쑥색으로 찹쌀을 물들여놓고, 참기름을 살짝 둘러 쌀을 타지 않게 볶았다. 한참 볶다가 물을 약간 붓고, 다시 볶다가 물을 붓고 하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한다. 쌀이 익으면 얇게 저며 놓은 전복을 넣어서 한소끔 끊인다. 천일염을 곱게 갈아서 간을 하고 불을 끈다. 이렇게 죽 쑤는 것이 밥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아픈 사람의 몸을 어루만지는 데는 죽만한 것도 없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가장 쉽게 마음을 나누는 작업이다. 환자를 위한 전복죽을 보온 도시락에 담은 뒤, 남은 죽으로 네 식구 아침을 차렸다. 이렇게 아름답게 아침을 여는 방법을 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죽음의 병동'에서 일하고부터였다.
내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심한 조우울증 환자였다. 결국 그 상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나는 '죽 쑤는 인생'이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싶어서,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공부를 했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결혼을 해서 따뜻한 가정을 꾸리면 그 속에서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중년이 될 때까지도 나의 삶은 늘 부정적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큰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미뤄둔 의사 수련과정을 시작했다. 그때가 40살이다.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지적(知的)으로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설움이 많았다. 느긋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 깨워서 학교 보내고, 건강을 위해 줄넘기 1천 개를 하고 출근했다.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이 익숙하지 못했다. 전공의 시절 하룻밤 동안 사망선언을 3명이나 하고, 컴컴한 당직실에서 혼자 자다가 가위에 눌려 운 적도 있었다. 연일 당직 서고, 밀린 차트 정리하다가 깜박 졸아서 시아버지 제사에 못 간 적도 있다. 10살이나 어린 선배에게 차트로 맞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인형의 집' 노라처럼 방황도 했다. 의대 입학 23년 만에 서투른 호스피스의사가 됐다.
삶의 끝자락이 머무는 평온관(호스피스병동)에서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오늘 쏟아지는 햇살의 따뜻함을 알았다. 죽음의 병동에서 내 환자는 그저 심장이 멈추는 주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은 이를 마음으로 걱정하고, 건강한 봉사자는 힘없이 말라버린 그들의 육체를 어루만져준다. 죽을 쑤는 것은 정성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서, 나는 평온관에서 인생의 죽을 제대로 쑤고 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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