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조센징? 천만에! 난 면허번호 81번, 비행사 박경원이야"
기수는 도쿄를 지나 가와사키 상공을 향했다. 멀리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4분, 푸른 제비호 '청연'의 하네다 공항 이륙은 성공적이었다. 박경원은 구름 아래로 이어진 푸르고 순결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떨려 왔다. 이곳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곳, 이곳에는 국경도 없고, 남녀도 없고, 조선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상과 머지않은 이 짧은 거리를 두고 세상의 풍경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음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일만 친선 비행'이라는 불편한 명분을 무릅써야 했지만 이 방법 외에는 고향 대구와 조국의 하늘을 나는 길이 묘연하였다. 이 비행을 보기 위해 고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포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경관의 발길에 차여 흩어지면서 사람들은 '윌슨의 비행기'가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조선을 도와주러 온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입니까. 이런 상태라면 조선의 독립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노 미키요의 '건널 수 없었던 해협' 중에서-
3'1 운동이 무참히 진압된 후, 분통한 마음을 담은 남동생의 편지를 받은 경원은 고국 방문 비행의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윌슨의 비행기'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윌슨 대통령이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고 조선의 독립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열망을 담은 채 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동생은 한탄하였지만, 땅 위에서 엄복동 선수의 자전거가 동포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듯이, 하늘에서 안창남 비행사의 비행기가 희망을 주었듯이, 경원 또한 고국 방문 비행을 통해 동포들의 가난한 염원에 작은 희망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멀고 더뎠다.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일본에서도 여자라는 신분은 번번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자는 엉덩이가 무겁고 발의 감각이 둔해 조종을 할 수 없다는 남성 관료들의 성차별적인 조롱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이 생산해내는 가십기사는 여자 비행사들의 행동을 제약시켰다. 그 염문설에 휩싸여 비행사 생명이 끝나버린 효도 타다시처럼 박경원 또한 그 모든 악조건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얼마 전 도쿄 니치니치신문은 박경원의 고국 방문 비행을 발표하며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후원으로' 라는 기사글로 고이즈미 타다지로와 그녀의 관계를 교묘하게 비약했고, 박경원의 거센 항의에 정정 기사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또한 비행사 자격증을 딴 비행사들이 고향 방문 비행을 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지만, 조선 남자 비행사들이나 일본 여자 비행사들과 달리 박경원에게는 고국 방문 비행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고국 방문 비행의 꿈이 점점 멀어져 가던 중, 만주 일대를 장악한 일본은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여 민간 비행사에 의한 연락 비행 계획인 '일만 비행'을 발표했다. 태평양 횡단의 꿈은 경원의 오랜 염원이었기에 경원은 이에 참가신청서를 냈고, 주최 측은 일등 비행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를 제외시켰다. 당시 여자는 일등 비행사 자격을 딸 수 없는 규정으로 인해 경원은 2등 비행사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선 일본부인항공협회가 여자 비행사에 의한 일만 비행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력을 갖춘 박경원을 제쳐놓고 비행경력이 짧은 후배 우에다 스즈코를 후보자로 밀고 있었다. 일만 비행은 순수한 일본 여성이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부인항공협회 이사장이 사기 혐의에 연루되자 우에다 스즈코의 비행이 취소되고 제국비행협회는 부랴부랴 박경원을 그 자리에 올렸다. 위험한 장거리 비행에 박경원의 비행실력이 적격이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조선인 여자를 그러한 영예의 자리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제국비행협회가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의 승인을 받기 위해 만들어 낸 명분은 바로 '일만친선 황국위문 일만연락비행'이었다. 이것은 전에 어떤 조선인 남자 비행사나 일본인 여자 비행사에게도 붙인 적 없는 명분이었고, 일본, 조선, 만주의 일체화를 강조하기 위해 제국비행협회가 만들어 낸 명칭이었다. 또한 그 시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조선인 여자 비행사를 영예의 자리에 앞세움으로써 조선반도를 병참 기지화하고 조선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숨은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원은 이 불편한 명분 앞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여성은 2등 비행사밖에 될 수 없는 규정 탓에 여성에게는 여객기나 수송기, 전투기 조종사 같은 직업인으로서의 비행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고, 고국 방문 비행이 묘연해진 상황 속에서 일만 비행은 비행사로서 다시없을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경원은 다른 여자 조종사들처럼 기록 비행이나 이벤트 비행만으로 비행사의 삶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열망으로 인해 박경원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염원이던 고국 방문 비행을 위해 일장기를 흔들며 비행기에 오르는 역사적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기수는 도카이도의 선로를 지나 에도시마를 향하고 있었다. 짙어지는 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금속 안으로 흐르는 규칙적이고 묵직한 진동이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난 경원은 어린 시절 여자라서 원통하다는 뜻의 이름인 '원통이'로 불렸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활달하고 당찬 경원을 바라볼 때마다 "사내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을..."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녀가 다니던 신명여학교는 처음 동향으로 지으려 했었지만 대구가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계집애들의 학교를 세운다는 것에 어른들이 반발해 결국 방향이 남쪽으로 바뀌어 세워졌다. 경원이 일본으로 와서 비행사 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남자들의 입에서는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자인 주제에!" "게다가 조센징이잖아!."
경원은 하늘이 좋았다. 하늘 위에선 원통이라는 이름도, 여자라는 이름도, 그리고 조센징이라는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꿈을 위해 달려온 한 사람의 비행사가 있을 뿐이었다. 경원의 마음속에는 원통이라 불리던 쓸모없는 계집아이가 이룬 꿈을 고국에 보이고 싶은 소망이 깔려 있었다.
푸른 제비호가 아타미 상공을 지나 하코네 산을 넘자 빽빽한 안개와 난기류가 푸른 제비호를 둘러쌌다. 두꺼운 안개에 싸여 경원의 근육들이 긴장되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고요한 적막이 주는 불안한 예감 속에서 경원은 조종석의 핸들을 꽉 쥐었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목표 지점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그것은 사람을 두렵게 하고 두려움은 사람을 좌절시킨다. 그녀는 은퇴한 동료들을 생각했다. 그녀들의 미래는 이 빽빽한 안개 만큼 불안하고 불투명했다.
'우리 여자 비행사들은 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항공계에서 은퇴해야만 했을까? 지금 그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괴롭고 참담하게 여기까지 온 그녀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나는 나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최후까지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비탄과 고통의 연옥에서 다시 용기를 불러일으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름옷을 몸에 걸치던 그날그날의 비행장의 생활, 이렇게 몇 년, 몇 개월을 반복해 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카노 미키요의 '건널 수 없었던 해협' 중에서-
경원은 오래 전의 결심이 현실이 되어 있는 지금을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공기의 소용돌이가 푸른 제비호를 때렸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갑자기 모든 것이 날카로워졌다. 공기와 산봉우리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산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릅뜬 눈앞으로 가파른 산맥이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들었다. 경원은 고도를 높이기 위해 급상승하며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엔진이 심하게 떨렸고 기체가 휘청거렸다. 경원은 상승 각도를 고쳤다. 순간, 순결히 잠든 듯한 산봉우리에서 환한 불이 번쩍 타올랐다. 뒤이어 엄청난 폭음이 그녀의 고막을 찢었다.
여의도가 보이는 한강 둑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 최초 민간인 여성 비행사의 비행을 보기 위해서였다.
"비행사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지?"
"그렇다지. 대구 태생의 여자인데 손이 솥뚜껑만 하고 힘이 황소를 들어 올릴 만치 장사라지?"
뒤이어 확성기에서는 서웅성 비행사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동포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선의 딸, 박경원 비행사가 하네다 공항을 무사히 이륙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힘을 모아 안전한 비행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여든 사람들의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세! 만세! 조선 만세! 박경원 만세!"
그녀가 죽어가는 시각,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늑골 아래를 강타당한 채 조종간을 잡고 있던 손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생명을 다한 육중한 금속의 옅은 진동이 가슴팍으로 전해졌다.
경원은 금속의 진동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몸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별것 아니야...'
어쩌면 승리란 완벽한 착륙이 아닐지도 모른다.
뻑뻑하고 적막한 회색의 두려움 앞에서 마지막까지 얼마나 철저히 싸웠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육체의 고독한 고통을 느끼며, 희미해지는 의식 속으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다!" "조센징이야!"
그녀는 조종간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천만에. 난 면허번호 81번, 2등 비행사 박...경...원이야..."
희미해지는 맥박과 함께 손의 경련이 멎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1시 17분, 하코네 항공 무선소는 하코네 남쪽 방향에서 들려오는 폭음 소리를 기록하였다. 다음날, 시즈오카현 전방군 다하촌 현악치에서 기수를 거꾸로 박은 푸른 제비호가 발견되었다. 피로 물든 비행사의 회중시계는 11시 25분에 머물러 있었다. 조선 최초 민간인 여성 비행사 박경원이 꿈을 꾸는 푸른 제비가 되어 영원히 창공으로 날아간 시각이었다.
김계희(그림책 작가)
◆우여곡절, 고향 비행이 마지막 비행
한국 최초 민간인 여성 비행사로 기록된 박경원은 1901년 대구 덕산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비행사의 꿈을 품은 박경원은 1925년 도쿄 가마다에 있는 일본비행학교에 입학, 1926년 일본비행학교 조종과에 정식 입학한다. 일본 비행학교 본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 당시 여자는 일등 비행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1928년 2등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당시 면허를 딴 비행사들은 고향을 비행하는 것이 관례였고 비행사들의 꿈이기도 했다. 안창남의 경우도 그랬고 박경원 또한 고향 방문을 계획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꿈은 우여곡절을 거쳐 '일만친선 황국위문 일만연락비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비행은 그 생의 마지막 비행이 된다.
2005년 박경원의 생애를 다룬 영화 '청연'이 친일 논란에 휩싸인다. 이에 수많은 반론들이 제기되면서 박경원의 생애가 여러 각도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박경원은 그 영화로 인해 공군 비행사 권기옥과 함께 여성 최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권기옥은 공군으로서 조선 최초 여성 비행사였고, 박경원은 조선 최초 민간인 여성 비행사임이 정확할 것이다. 카노 미키요가 10년이 넘는 취재와 퇴고를 거쳐서 펴낸 박경원 평전 '건널 수 없었던 해협'이 1994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도 박경원의 생애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규명이 필요할 것이다. 당시의 상황들은 '건널 수 없었던 해협' 및 많은 인터넷 참고자료들을 종합하여 구성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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