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는 무심히 세월만 보냈네… 망국 恨 못 갚으면 죽어서도 못
靑邱士子仰蒼蒼 萬事無心一失長 十五年前今日恨 生如不報死難忘(조선의 선비는 하늘만 쳐다보고, 만사를 무심히 세월만 보냈네, 십오년 전 오늘의 망국 한은, 살아서 못 갚으면 죽어서도 못 잊으리)-일본 지바 감옥에서 추강 김지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의열투쟁은 1920, 30년대를 장식한다. 의열투쟁이란 한 개인이나 소수의 독립투사가 민족의 자결권을 되찾기 위해 일제에 목숨을 걸고 무력으로 맞선 의로운 투쟁이다. 응징의 대상 또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의 주요 기관과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차별성을 가지는 식민지 해방투쟁이다.
의열투쟁은 임시정부 수립 후 독립운동이 다소 미온적이라는 반성적 자각에서 비롯됐다.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불만이 급진적인 폭력투쟁으로 표출된 것이다.
의열투쟁의 대표는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었고, 투쟁의 이념을 체계화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의열투쟁사에 찬란한 이름을 드러낸 발군의 인물들. 김시현 김지섭 이종암 장진홍 등이 바로 대구경북지역 출신이다.
국내에 대량의 폭탄을 들여왔다가 붙잡힌 김시현은 17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살았다. 김지섭은 관동대지진 때 살육당한 동포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 궁성을 파괴하려 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일본왕을 공격 목표로 삼은 최초의 의거였다. 이는 8년 뒤 일본왕을 처단하려던 이봉창의 무력투쟁으로 연결되었다. 이종암은 의열단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투쟁하다가 옥중 순국했고,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트렸던 인물이다.
◆김시현
안동 풍산 출신인 김시현은 1920년 9월 밀양폭탄사건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고 나와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고려공산당원이 되었다.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그는 1922년 5월 대규모의 암살파괴거사를 추진한다.
조선 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장건상 김원봉 등 의열단 지도자들과 폭탄 확보에 나섰다. 작전에 쓸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국내로 옮기는 작업에는 경기도경찰부 고등계 경부로 고려공산당 비밀당원인 황옥의 도움을 받았다.
의열투쟁에 일제의 현직 경찰 간부가 적극 가담한 점이 이채롭다. 1923년 2월 김시현은 고향인 안동을 답사하고 폭탄 중계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중국 톈진(天津) 프랑스 조계지의 어느 여관에서 김원봉을 만나 무기와 자료를 인계받았다.
건조물 파괴용 대형 폭탄 6개와 부속품인 시계 및 뇌관 각 6개, 방화용 소형 척탄 17개, 암살용 소형 척탄 13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 그리고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각 관공리에게' 등 전단 수백 장이다.
이만한 분량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국내로 들여온 무기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사에 사용할 이 무기들을 서울로 옮긴 다음 날 일경에 발각되는 바람에 '5월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김시현은 1929년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김시현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1932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국내외에서 생도 모집의 책임을 맡았는데 민족시인 이육사 또한 그런 인연으로 입교하게 된다.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시현은 배반자를 처단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에 파견된 한삭평이 변절해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를 응징했다.
이 일로 김시현은 다시 검거되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4년 7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출감한 이듬해인 1940년 1월 김시현은 서울을 거쳐 북경으로 건너갔다. 투쟁의 공간으로 서슴없이 되돌아간 것이다. 조국 독립을 위한 불굴의 행로였다.
◆김지섭
김시현과 동향인 김지섭은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투쟁에 투신했다. 1922년 김시현과 함께 서울로 잠입해 유석현 윤병구와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섰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해 12월 조선총독부 판사 백윤화에게 독립운동자금 5만원을 요청하고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실패한 것이다. 이어서 김시현이 앞장서서 대량의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다가 거사 전에 탄로가 나자 하는 수 없이 나라 밖으로 탈출했다.
상하이로 피신한 김지섭은 1924년 1월 일본 도쿄(東京)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벌였다. 일제의 심장부를 노린 이 같은 투쟁은 일본인들에게 참혹하게 죽어간 동포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복수였다. 1923년 9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고 피해가 엄청나자 일본 당국은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지진을 악용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해 6천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의열단이 이를 응징하면서 세계의 이목과 여론을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주역을 물색했는데 김지섭이 앞장서 나섰다.
김지섭은 1923년 12월 21일 밤 대추형 수류탄 3개를 지닌 채 석탄운반선에 몸을 싣고 열흘 뒤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매년 초 열리는 '일본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의회가 휴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대상을 바꿨다.
1924년 1월 5일 일왕이 거주하는 왕궁 정문으로 접근하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자 이에 불응하며 폭탄을 던졌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쥬바시(二重橋)와 정문 쪽에도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이 또한 터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왕의 처소에 폭탄을 던졌으니 일본 열도가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27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다음해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이종암
이종암은 대구 사람이다. 대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대구은행에 취직한 그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만주를 왕래하며 동지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은행 금고 속에 있던 1만900원의 돈을 꺼내 만주로 망명, 무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원봉 이성우 황상규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한 후 상하이로 가서 폭탄제조 방법을 배웠다.
이종암이 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였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에게 전해 만주 봉천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를 설립하는 자본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922년 3월 이종암은 김원봉 김익상 오성륜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하이로 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상하이의 세관부두에서 결행한 다나카 저격은 권총이 명중하지 않고 폭탄이 불발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김익상 오성륜 두 동지만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이종암은 1925년 폭탄과 권총 및 조선혁명선언문을 지참하고 단신 밀입국했다. 1만원의 자금을 모으면 도쿄에 가서 거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밀양폭탄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동지들과 자금 조달을 추진하며 경북 달성의 어느 산장에 은신하고 있던 그는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종암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결핵으로 가출옥 후 세상을 떠났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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