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許蔿 손녀의 눈물

입력 2011-02-26 09:00:00

"이 집, 저 집 옮겨다닐 수도 없고 해서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려고도 했으며, 구미의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의 나라인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야만 하는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1855~1908년) 선생의 유일한 손녀 허로자(87) 할머니.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고 어눌한 탓일까. 아니면 그간의 회한(悔恨) 때문일까.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하고 끊기곤 했다. 국적 취득 과정의 사연은 할머니의 9촌 조카인 허벽 씨를 통해서 겨우 퍼즐 게임처럼 맞출 수 있었다.

허 할머니는 3'1운동 90주년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암살 100주년이던 2009년 9월 28일 허위 선생의 생가 부근 동산에 서거 100년이 넘어서 마련된 왕산기념관 개관 때 구미를 찾았다.(본지 2009년 10월 10일자 야고부 보도) 허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던 땅에 뼈를 묻고 싶다'고 했고, 그 소원을 풀기 위한 국적 회복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됐다.

할아버지 나라의 국적 취득 과정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허울 좋은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옛소련, 동토(凍土)에서 얻은 동상으로 다리를 절게 된 여든 넘은 노인이 감당하기엔 힘겹기만 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야 했고, 잠자리가 마땅찮아 여관과 친인척 집을 전전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에겐 가혹한 고생 끝에 할머니는 올 1월 15일 한국 국적을 얻었다.

불편한 몸에 관련 기관들을 방문하느라 국적 신청부터 꼬박 1년 3개월이나 걸린 셈이다. 국가의 많지 않은 지원에 의지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처럼 허 할머니 역시 돈이 문제였다. 국적은 얻었지만 마땅히 살 곳이 없어 정부 지원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그래서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고 한다.

다시 맞게 되는 국경일이자 공휴일인 3'1절을 앞두고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허 할머니. 1949년 3'1절 국경일 법 제정이 올해로 62년을 맞았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전국은 태극기 물결이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운동과 일제에 항거한 독립 의사'열사'운동가들을 기린다. 하지만 국경일의 연륜이 쌓여가는 만큼이나 선열에 대한 우리 의식이 성숙됐다고 할 수 있을지 부끄러울 뿐이다.

정인열 중부지역본부장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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