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 제1부-나라사랑 7)왕산 허위

입력 2011-02-25 07:33:22

을미의병 기치…배일통문 주도…서울 진공 지휘…의병전 최고봉

허위의 초상화. 러시아에서 미술을 전공한 증손녀 미라(53·3남 埈의 손녀) 씨가 그렸다.
허위의 초상화. 러시아에서 미술을 전공한 증손녀 미라(53·3남 埈의 손녀) 씨가 그렸다.
허위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허위는 이곳 사형수 1호였다.
허위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허위는 이곳 사형수 1호였다.
나라가 무너지던 그때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신묘년 정월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기념공원에 세운 왕산의 동상을 찾은 장손자 허경성(아래쪽 왼쪽) 씨. 그 옆으로 김교홍 왕산기념관장,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 위쪽 왼편이 왕산의 일족인 허복 구미시의회 의장이고 그 옆은 이길수 왕산기념관 사무국장.
나라가 무너지던 그때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신묘년 정월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기념공원에 세운 왕산의 동상을 찾은 장손자 허경성(아래쪽 왼쪽) 씨. 그 옆으로 김교홍 왕산기념관장,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 위쪽 왼편이 왕산의 일족인 허복 구미시의회 의장이고 그 옆은 이길수 왕산기념관 사무국장.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당하지만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高官)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자가 많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안중근 의사-

왕산 허위(1855~1908)는 독립운동사의 첫 장인 의병전쟁에서 최고봉에 우뚝 섰던 위인이다. 을미의병의 기치를 올렸고, 1900년대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개혁을 지향하고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가 그를 김천의 지례 골짜기에 강제로 유폐시켰지만 기어코 다시 일어나 경기도 일대의 의병을 이끌었으며,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서울의 동대문 바깥 30리까지 진격했던 인물이다.

◆을미의병과 좌절

허위가 구국의 행동대열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되어서이다. 허위는 맏형 허훈과 함께 동학농민항쟁을 피해 청송 진보에 와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를 접했다. 그리고 을미의병의 소식을 들었다.

유생들의 전국적인 봉기에 자극을 받아 허위 형제들도 창의를 결심했다. 맏형 허훈은 진보에서 창의하고, 허위는 김산(김천)에서 거병하기로 했다. 1896년 3월 상주·선산의 유생들과 함께 김산으로 간 허위는 이기찬·조동석·이기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군비·전략 등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공주와 대구에서 관군이 출동하면서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허위는 남은 의병 가운데 포군 100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직지사에서 재기해 북상하며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의병을 급히 해산하라'는 국왕의 밀지를 받고는 의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답답한 심정을 허위는 이렇게 읊었다.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

◆관직생활과 항일운동

을미의병 해산 이후 허위는 허훈·허겸 등 형들과 함께 청송 진보에 은거하다가 1899년 2월 신기선의 천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허위는 고종의 신임을 받아 영희전참봉·성균관박사 등을 거쳐 중추원의관·평리원수반판사·평리원재판장·의정부참찬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허위가 중앙 관직에 있을 때 주목할 만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항일언론가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과의 교류이다. 전통 유학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허위는 장지연을 통해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허위는 항일 언론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정우회를 조직해 반일·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정부관료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상황이었지만, 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항변했다.

일제는 전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배일통문의 주모자가 허위임을 밝혀내고 헌병대에 구금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의정부참찬에서 사임시킨 뒤 석방했으나, 두 달 뒤 다시 비서원승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관료이자 반일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허위의 전력을 두려워한 일제는 최익현·김학진 등과 함께 그를 다시 구금했으며, 다른 사람을 석방한 뒤에도 허위만은 4개월 동안이나 헌병사령부에 더 붙잡아뒀다.

그래도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와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끝내 굽히지 않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허위를 헌병의 감호 아래 강제로 귀향시켰다. 경상·충청·전라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지례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허위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의 비보를 들었다.

◆서울진공작전과 순국

이때부터 허위는 경상·충청·강원·전라·경기도 등지를 다니며 우국지사들과 의거를 결의하고, 1906년 6월 여중룡·이강년·우용택·이병구 등과 창의를 계획했다. 이때 영천의 의병장 정환직에게 2만냥의 군자금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8월 군대 해산 이후 허위는 연천·적성·철원·파주 등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며 대일전의 선봉에 섰다. 특히 고향이 아닌 경기도 북부와 남부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의 활약상은 허위의 지략과 인품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매국분자들을 처단하는 등 의병활동을 펼치던 허위는 이인영 의진 등 각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대일항전에 보조를 같이하기 시작했다.

1908년 12월에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이 통합 의병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세우고, 관동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허위는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軍師將)을 맡았다.

13도창의군의 규모는 48진에 병력이 1만여 명에 달했다. 허위의 경기도 의병 2천 명을 비롯해 강원도 민긍호 의병 2천 명, 이인영 의병 1천 명, 충청도 이강년 의병 500명, 황해도 권중희 의병 500명, 전라도 문태서 의병 100명, 평안도 방인관 의병 80명 등이다.

13도창의대진소는 즉시 서울진공작전에 돌입했다. 허위는 이에 앞서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했다. 1908년 정월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거느리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후속 부대와 연락이 단절되면서 패퇴하고 만다.

총대장 이인영이 문경의 본가로부터 부친의 부음을 전해 듣고 귀향하는 바람에 서울 총공세를 앞두고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작전을 일제가 미리 알고 한강의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서울 외곽 방어에 만전을 기했던 것도 실패의 큰 원인이었다.

서울 진공작전의 좌절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기동력과 화력이 일본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있던 의병부대의 전력을 하나로 모아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1908년 2월 허위는 의병을 수습해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환·김수민·김응두·이은찬 등의 의병부대와 함께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부대를 소단위대로 편성해 도처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같은 해 5월 허위는 통감부에 '고종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이권 침탈 중지' 등 30여 개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허위는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채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포천에서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일본군 헌병사령관의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고매한 인격과 강직한 성품으로 일제의 침탈을 지적하며 오히려 그를 감복시켰다.

사형선고를 받은 허위는 그해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해 54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순국 직전 왜승(倭僧)이 명복을 빌기 위한 독경을 청하자 허위는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겠느냐"고 꾸짖으며 물리쳤다.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지내지 못했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불충과 불효를 지었으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暝目). 한평생 구국충정과 항일투쟁으로 일관했던 왕산 허위가 남긴 유서이다. 그의 순국정신은 박상진과 안중근의 불꽃 같은 독립투쟁으로 계승되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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