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옛집이 있는 거리

입력 2011-02-16 08:09:41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앗제의 쓸쓸한 흑백사진 같은 2월이다. 회백색 하늘은 무겁고 오래된 거리를 떠돈 공기에선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난다. 시류에 뒤떨어지게 토착(土着) 기질이 유난한 나를 종종 거리로 내모는 2월의 오늘 같은 날, 몽유(夢遊), 몽상적 기질 아닌가 혼자 씁쓸해하면서 나는 또 옛집이 있는 거리에서 발을 멈춘다. 영화 촬영지로 추천하고 싶을 만큼 삼십여 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옛집이 있는 옛길, 나는 걷고 또 걷는다. 스스로 고백하건대 이 길은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이란 뜻을 가진 나의 풍크툼(punctum)이며, 어쭙잖은 내 글쓰기의 근간(根幹)이다.

푸르스름한 외벽 타일이 붙은 내가 태어난 집을 스쳐 지나고, 길가에 커다란 번철을 내놓고 계절마다 제철 생선을 구워 호객하던 공장 옆 선술집 자리도 지난다. 저 선술집의 많은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유난히 볼이 붉고 눈이 커다랗던 저집 막내아들도 이젠 사십대를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으리. 잇단 선술집 부부의 부고(訃告)와 커다랗게 소리 내어 울던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와 눈물범벅이 되어 있던 그 얼굴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하다.

천천히 걸어 적산가옥이었던 국수공장 자리를 지난다. 어떻게 변한 게 없군. 옷깃을 올리고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걷는다. 맞은편 좁은 골목에서 모자를 쓴 작은 아이가 통통통 튀어나와 큰 길로 달려나간다. 벙어리장갑이 목줄에 매달려 통통통 무거운 공기 속에서 뛰어오른다. 한참을 서서 빙긋 웃으며 바라보다 검은 덧문이 있는 집을 발견한다. 아, 저 미닫이 덧문이 아직 그대로 있네. 이른 아침, 뚱한 표정의 단발머리 식모 언니(왜 그땐 모두 이런 야만적인 호칭을 썼을까)가 닫힌 검은 덧문을 한 짝씩 떼어내던 점방(店房) 자리다.

사탕과 단추과자와 알록달록한 색물 주스들 그리고 과일과 푸성귀들이 찬란하게 진열대에 제 몸을 드러내면, 아이들은 점방 앞길에서 고무줄 놀이나 줄넘기를 하고, 뚱뚱한 여주인이 하품을 하며 바가지에 떠온 물로 길바닥에 뿌려 대곤 했던. 아련하다. 손이 닿으면 푸스스 껍질이 묻어나던 나무 전봇대 자리를 지나고, 뚜껑에 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렸던 우물 자리를 지난다. 찬바람이 매서워지고 코끝이 시려온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어디선가 저녁밥 먹으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린다. 이젠 옛집이 있는 거리를 떠나야 할 때.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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