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만큼은 상처없이 고루 먹이자" vs "밥보다 더 급한 복지부터 챙기자"

입력 2011-02-12 08:18:00

무상급식 논란, 시민들의 생각은

정치권이 연일 '무상급식' 논쟁으로 뜨겁다. 여기에 시민사회단체들까지 가세를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밥'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내년 선거에서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고 몰아세우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밥 한 끼 제대로 먹이자는데!'라며 목청을 돋운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정작 아이들의 급식 문제에 가장 민감한 학부모와, 복지 현장의 목소리는 빠져있다. 이참에 '복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고공플레이로 시작된 논의는 정책에 대한 근본적 논의보다는 이념 논쟁적 측면이 강해지면서 감정에 호소하는 쪽으로만 확산돼 가는 분위기다. 무상급식 논란, 과연 학부모를 비롯한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봤다.

◆저소득층 선별적 무상급식부터

기자가 이번 취재를 위해 직장인, 자영업자, 교사, 복지 담당 공무원 등 모두 20명에게 물었다. 상당수 사람들은 당장 전면 무상급식 실시는 어렵다고 보며 저소득층을 위한 선별적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명은 무상급식 찬성 입장을 밝혔다. 20명 가운데 70%가 사실상 무상급식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찬성한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의 논지는 대부분 "아이들 밥만큼은 평등하게, 상처없이 먹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릴 때부터 '돈'에 휘둘리며 기죽어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아직 선별적 복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면 무상급식 논의는 너무 이르다"면서 "내 자녀의 밥값을 부담해도 좋으니 차라리 어려운 아이들에게 밥뿐이 아닌 다양한 부분에 대해 충분한 복지혜택을 주라"고 답했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국민들에게 무상급식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무상급식 찬반에서는 찬성이, 무상급식 범위에 대해서는 선별적 무상급식 여론이 더 높게 나타났다. 무상급식 찬반에서는 찬성한다는 응답자가 51.7%,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38.3%로 나타나 무상급식을 찬성한다는 응답이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무상급식 범위에 대한 조사에서는 '저소득층부터 선별적으로 무상급식을 해야한다'는 응답이 62.3%,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시작해야 한다'는 응답이 34.5%로 나타난 것. 많은 사람들이 무상급식 도입에는 찬성하지만, 전면급식보다는 선별적인 무상급식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문화일보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2.5%는 초·중등학생 무상급식에 대해 '저소득층에 선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답했고, '의무교육 대상자인 초·중등학생 전체에 무상급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답변은 응답자의 36.8%를 차지했다.

◆내 자녀 급식의 질 하락하면 어쩌나

이모(45·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씨의 딸(고2)은 지난가을부터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다니고 있다. 학교에서 직영으로 운영되는 점심 급식은 그나마 먹을 만하지만 외부 급식업체가 공급하는 저녁 급식은 도저히 먹기 힘들다고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공무원 김모(43·여) 씨도 얼마 전부터 고교생 아들의 저녁 도시락을 싸주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아이가 몇날며칠을 눈치만 살피더니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 다닌다며 넌지시 말을 꺼내더라""며 "엄마가 직장에 다니다 보니 도시락 싸달라는 말을 하기 힘들어 한참을 혼자 고민하다 어렵게 빙 둘러 말하는 것을 보고 음식 투정 없는 아이가 오죽했으면 저럴까 마음이 다 아팠다"고 했다.

사실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는 가정의 부모 입장에서는 한 달에 5만원 수준에 불과한 급식비는 큰 부담은 아니다. 이 지출을 줄여 가계에 득을 보기 위해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무상급식에 필요한 재원은 결국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부담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인식도 강했다. 황모(40) 씨는 "이러나 저러나 내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좀 더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내고, 저소득층이 적게 내서 무상급식을 실시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유리지갑인 월급쟁이들의 부담만 커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오히려 무상급식이 실시됐을 때 질적 하락을 우려해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영업을 하는 안모(43·여) 씨는 "국민의 세금으로 전체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다 보면 결국 급식의 질적 하락은 뻔한 결과 아니겠느냐"며 "차라리 지금보다 두 배 비싼 급식비를 내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정말 맛있고 영양가 높고 안심할 수 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저소득층에게 더 나은 복지서비스를!

십수년을 복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공무원은 "당장 해결해야 할 복지 과제들이 산더미인데 왜 갑자기 무상급식 논쟁이 불붙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해보면 당장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환자,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는 주거빈곤층 등 당장 전체 학생 밥 먹이는 문제보다 더 급하게 국가가 해결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보편적 복지가 이뤄지는 복지국가가 되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라며 "무상급식을 위해서는 국가 재정이 충분히 확보되고, 잘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돈을 내놓는 선진기부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보육비 지원 등 일부 복지 혜택이 중산층까지 확대되면서 재정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자체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라 무상급식은 더욱 힘들다는 지적이다. 그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보편적 복지로 인한 복지 재원이 3, 4배 늘어나면서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복지 예산은 오히려 줄고 있는 실정"이라며 "더구나 보편성을 위장하고 있을 뿐 현장에서는 일일이 조사를 해서 선별적 복지 형태를 갖추도록 제도를 만들어 놨기 때문에 추가적인 행정 비용도 만만찮다"고 했다.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낙인 효과'에 대해서도 학교 현장에서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주장"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밥을 못 먹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지원이 필요한 거의 모든 학생들에 대해서는 개별 상담을 통해 국가 혹은 학교 차원에서 무상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사 한모(35) 씨는 "급식 문제로 인해 낙인효과가 발생하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전면 무상급식을 해야겠지만, 문제는 급식이 아니라 각종 생활 환경 전반의 차이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입고 있다는 점"이라며 "무상급식보다는 선택적 복지혜택을 강화하는 것이 더 시급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어머니와 단둘이 한 달에 28만원 남짓한 돈으로 생활하면서도 자격 제한에 걸려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박모(18) 양은 "차라리 학교에서는 편안하게 급식을 먹을 수 있어 좋지만 주말이 되면 어머니가 무료급식소에서 얻어온 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며 "무상급식이 아니라 학비를 비롯한 생활 전반에 대한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어쨌든 복지 혜택 확대는 필요

무상급식 논의가 터져나오면서 함께 따라나온 것이 바로 '세금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힌 사람들 역시 "쓸데없이 낭비되는 세금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했다. 4대강 예산을 비롯해 국민의 필요와 상관없이 정부의 선심성·전시성 행정을 위해 낭비되는 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전업주부 임모(33) 씨는 "사실 세금이 제대로 쓰이기만 한다면 복지 혜택 확대를 위해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정부의 행태라면 세금 인상에 절대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은재식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도 "대구시가 재원이 없어 무상급식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벌어진 경북대병원 사태로 응급진료체계에 구멍이 뚫리자 긴급히 30억원 예산을 편성하더라"며 "평상시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안이지만 사고가 생기니 당장 예산을 내놓는 걸 보면 역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세금을 어떻게 써야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어쨌든 상당수 시민들은 '복지 확대'라는 근본 취지에는 찬성했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나듯이 시기가 문제이긴 하지만 무상급식 도입 자체에는 찬성 입장을 밝히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자영업자 박모(40) 씨는 "우리 애들 급식비는 별도로 내도 좋다. 세금을 더 내도 좋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을 충분히 찾아내고,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비용을 부담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치권의 무상급식 논쟁에 대해 상당수 시민들이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일부에서는 "복지의 개념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된 만큼 긍정적이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은재식 사무처장은 "논의의 시작은 무상급식이지만 앞으로 조세 및 복지제도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보육, 의료, 대학등록금, 주거 등의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는 복지가 단순히 빈곤층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돼야 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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