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수령(蒼水嶺), 해발 칠백미터.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느끼지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루스름하게 그림자 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간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 줄기며 떡갈 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 그리고 연약한 줄기 끝만 겨우 눈밖으로 나와 있던 진달래와 하얀 억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수십년생의 싸리나무가 덮인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각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소설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등장해 유명해진 영덕군 창수면과 영양군을 잇는 창수령 고개. 1981년 발표돼 전국에서 화제가 됐던 이 소설에서 이문열은 창수령에 대해 지상 최고의 극찬을 했다. 이문열이 소설을 쓰기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비포장길에서 포장길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이 길은 늘어놓기도 벅찬 찬사처럼 '낙동정맥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낙동정맥의 보물
신라시대 이전부터 고갯길이 열린 것으로 전해지는 창수령. 창수령은 이문열이 소설에서 언급한 뒤 공식 명칭이 됐다.
영양군 석보면에서 성장한 이문열은 어린 시절 창수령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창수령의 동쪽에 위치한 영덕군 창수면 일량리 마을이 이문열의 일족인 재령 이씨 집성촌이었던 것. 어린 시절 이문열은 집안 행사 등으로 창수령을 수없이 넘었고 그때 창수령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창수령은 조선시대 영해부 관할인 영해·영덕·울진·흥해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옛날 대구와 의성, 경주 등지의 영남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통해 한양으로 갔지만 선비 고장으로 유명했던 영해부 관할지역은 지형상 창수령을 이용했던 것이다.
창수령의 본래 이름은 읍령(泣嶺) 내지 울티재였다. 재가 워낙 험해 '울면서 넘는다'는 뜻이었으며, 큰재로 불리기도 했다.
유래는 2가지다. 한 가지는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도망가던 궁예 부하들이 창수령을 넘으면서 너무 힘들어 울었다는 설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수탈에 고통받던 민초들이 조세나 곡물을 등짐지고 재마루를 넘을 때 힘들어서 엉엉 울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동네 이름을 따 창수령으로 불리다 이문열의 소설 이후 창수령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영덕군 창수면에서 영양군 양구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창수령은 조선시대 관리들을 영접하거나 전송하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근 독경산 지맥에서 가장 높을 뿐 아니라 매우 험한 창수령은 당시 산적이 많기로도 악명이 높았다. 한양으로 향하던 상인이나 선비들은 재 밑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20∼30명씩 모이길 기다려 함께 재를 넘었다. 또 양반들은 많은 하인들을 대동하고도 산적이 무서웠기 때문에 관원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재를 넘어갔다고 한다.
조선시대 안동간고등어에 대한 흔적도 이곳에 있다. 영해 바닷가에서 산 고등어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소금을 뿌린 후 창수령을 넘어 영양이나 안동에 도착하면 숙성된 안동간고등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옛 모습 찾기 어려워
이렇게 수천년간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눈물, 발자취가 묻어있는 창수령의 옛 모습은 아쉽게도 지금은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1980년대 후반 창수령 고갯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과거 옛길 대부분이 절개되고 뜯겨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남아있던 과거 창수령 오솔길도 20여 년 동안 인적이 끊기면서 수풀이 우거져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사실상 창수령을 넘어 가는 고갯길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창수령 정상 부근인 속칭 '자라목'에는 농사를 짓던 주민들이 꽤 살았다고 한다. 당시 자라목에 있던 '신리초교 자라목분교'는 전교생 수가 30명이 넘을 정도로 꽤 번성(?)했으나 70년대 후반 폐교되면서 이곳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창수령의 지형도 다소 바뀌어 도로공사를 하면서 창수령 정상 부분이 20m가량 깎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점락 창수면장은 "일제강점기 영덕군-영양군 경계선이 창수령 정상에 그어지지 않고 영양 방면으로 600m 산아래에 그어졌다"며 "간혹 군 경계선에 대해 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감춰진 옛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창수령의 명맥을 유지하는 옛길이 없지는 않다.
하나는 창수령 정상에서 영양 방면으로 좌측에 난 등산로 오솔길로 청송 주왕산국립공원으로 연결되는 낙동정맥의 일부 구간이다. 이 길은 창수령-울티재-맹동산-명동산-황장재(20㎞·6시간) 구간에 이어 대둔산-대궐령-별바위(달산면·포항 경계)-주왕산으로 이어진다.
등산객들은 창수저수지에서 4㎞를 걸어 올라 울티재를 통해 낙동정맥을 주파하기도 한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이 우거진 이 옛길은 산림욕 효과가 큰데다 다소 완만한 폭 1m 안팎의 코스로 인기있다. 또 이 오솔길은 맹동산 영양풍력단지의 풍광이 또 하나의 볼거리이며 인근에는 고품질 송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하나는 창수령 정상 우측에 있는 백청리 망산골 등지로 연결되는 비포장 도로인 임도다. 사람이 많이 다니다 보니 길이 생겨났고 그러다 폭 4m 안팎의 임도로 사용되고 있다. 산림이 우거져 있고 주변 경관이 좋은데다 햇빛을 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이다. 인근에 산나물과 두릅·더덕·산딸기가 많고 경사가 급한 곳은 평탄 작업을 해 놓아 가족끼리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다만 일대에 자주 출몰하는 멧돼지를 조심해야 하며 2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1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산불예방을 위해 출입이 통제되는 아쉬움이 있다.
윤 면장은 "옛길 일부 구간을 재현하는 등 낙동정맥 트레일 조성 사업이 벌어지고 있고, 창수령 고갯길 도로변 넓은 공간에는 대형 관광안내판과 쉼터를 만들 계획"이라며 "수년 뒤에는 더 많은 옛 정취와 볼거리가 있는 창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리가 녹아있는 길
창수령은 변화를 꿈꾸고 있다.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길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찾으면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진다. 이를 위해 윤점락 창수면장은 이문열 작가와 만남을 갖고 소설에서 묘사한 풍광 4곳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해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로 했다.
안내판은 사진과 간단한 설명이 포함돼 있어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바로 펼쳐볼 수 있다. 소설 속 스토리가 녹아있는 길은 걷는 이에게 소설의 주인공이 나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무아지경을 선사한다.
윤 면장은 "소설의 아름다운 구절 가운데 창수령의 풍광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 4곳을 추려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라며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길로 새롭게 단장해 창수령의 아름다움을 전국에 뽐내겠다"고 말했다.
영덕·박진홍기자 pj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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