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km 뻗어온 만리장성 종점…톱날처럼 둘러친 3중 성곽 '위용\
장예(張掖)에서 자고 발길을 재촉하여 점심 때쯤 도착한 곳이 가욕관이다. 같은 사막이라도 간간이 옥수수밭과 미루나무라도 지나가면 마음이 너그러워지지만 낙타 풀만 앙상한 모래벌판을 지나가면 목젖이 타들어간다. 가욕관시는 하서회랑 중간 지점에 있어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다. 1950년대 후반 남쪽의 경철산(鏡鐵山)에서 대규모 철광이 발견되어 지금 이 시의 인구 18만 명 대다수가 철광관련 산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그래선지 다른 시보다 도시 전체에 윤기가 흐른다. 가로수 밑의 작은 도랑에는 기련산맥의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른다. 우리나라의 이슬 내린 양보다 적은, 연 80㎜ 비가 오니 비 오는 날이 곧 여기서는 축제일이다.
가욕관성 입구에 내리니 사막답잖게 구안천호라는 호수가 있고, 호반엔 정자까지 있다. 호수 너머에는 가욕관성 성루가 우뚝한데, 외성의 성가퀴가 촘촘한 톱날처럼 내성을 감고 있다. 이 고성이 호수에 비치니 꼭 '유충렬전' 표지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 소설의 중국 정서가 뭉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장군 풍승(馮勝)이 실크로드 통행을 감시하기 위해 이 토성을 쌓은 것이 1372년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은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6천km나 이어져 서쪽 끝 이 가욕관성에서 마감한다. 가욕관성은 하서회랑 한가운데에 토성을 쌓아 이 회랑을 틀어막고 있어 아직도 양떼가 넘어다니면서 짜증을 낸다.
1372년이라면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가 카라코룸으로 도피한 지 불과 4년째 되는 해다. 티무르가 서(西)투르키스탄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를 통일한 지는 2년째가 된다. 이때 명나라는 서쪽, 북쪽의 몽골족이 언제 다시 보복하려 중원을 침략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싸여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티무르는 1405년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주원장 때 이 만리장성을 연장하고 보수하고 그 끝자락에 가욕관을 세운 것은 한족이 세운 명나라의 위세를 타민족에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때 한족은 109년간 지배를 받아오던 몽골족을 겨우 몰아낸 뒤였다. 그러나 한족과 몽골족은 성(城)의 개념이 다르다. 몽골족은 60여개 국을 정복했지만 어디에도 성을 쌓으려 돌을 목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들뢰즈가 말하는 경쾌한 '노마드'였지만, 한족은 뒷심이 질긴 민족이었다. 골통 폭군은 성을 짜던 인부의 시체를 쑤셔 넣어서라도 성을 높이 쌓고 타민족을 야만인으로 내몰았다. 오늘날 중국 국토 한가운데로 나 있는 만리장성은 예부터 그 북쪽이 중국 영토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지금 중국인이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껄끄러운 증거가 아닌가. 지금도 중국이 인권문제나 티베트 문제를 제기하면 내정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만리장성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가욕관성에 들어서면 내가 첩자가 된 것 같다. 그 오목조목한 군사비밀을 다 찰칵찰칵 카메라에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성의 배치는 흙담을 높이 쌓은 내성(內城)이 있고 그 안에 장군부와 공관, 말하자면 사령부가 있다. 그 내성 동서에 궁륭형 문이 있고 그 위에 날아갈 듯, 웅장한 성루가 있어 먼데서 보면 멋진 실루엣을 이룬다. 성루 용마루에는 잡상을 베풀고, 귀처마가 하늘을 찌르도록 하여 군의 위용을 과시한다.
성문 밖을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으로 한 번 더 에워싸고, 그 밖에 외성(外城)으로 넓게 또 한 번 더 둘러쌌다. 토성이지만 아직도 말짱한 것은, 황토를 엄선하여 햇볕에 말린 뒤, 그 가루를 곱게 체로 치고 찹쌀 풀을 해 넣어 성벽에 발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문 옹성 밖에는 관제묘(關帝廟), 문창각(門昌閣), 희루(戱樓) 등이 있다. 관제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 온 명군은 전쟁은 게을리하면서도 곳곳에 관제묘는 세우지 않았던가. 문창각은 일종의 공연을 위한 무대 건물이다.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에는 도사가 서있고 왼쪽에는 꽤 관능적으로 생긴 여자가 앉아 있다. 도사가 도를 잊고 흘깃흘깃 여자 쪽을 보는 음양의 이치를, 놀랍게도 2층 천장에 그려놓은 팔괘(八卦)가 암시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용도가 없어지면 예술품이 되듯이, 가욕관성도 이젠 빛바랜 건축예술품에 불과하다. 보얀 부속건물은 사막의 모래바람을 앉혀 그 흙모래로 빚은 것 같다. 기와도, 벽도, 기둥도 다 먼지 색이다. 이미 청나라 때에 이 성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임칙서(林則徐)가 이 성에 와 보고 "만리장성 차가운 달빛에 말에게 물을 먹이고 / 모래바람 부는 오랜 성루 위로 독수리만 떠도네"라고 읊어, 우리나라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우수에 젖고 있다.
글·박재열 (시인·경북대 교수) 사진·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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