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 도하작전의 영웅' 연제근 상사와 12인의 특공대

입력 2011-01-28 08:00:41

敵기관총 진지 깨부수고 장렬히 산화

연제근 특공대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포항시가 남구 해도공원에 만든 특공대 동상. 이곳을 찾은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회 최봉소(오른쪽) 회장과 이춘술 사무국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연제근 특공대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포항시가 남구 해도공원에 만든 특공대 동상. 이곳을 찾은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포항시회 최봉소(오른쪽) 회장과 이춘술 사무국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1950년 9월 17일 오전 4시.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형산강 너머 적의 기관총 진지를 바라보는 국군용사 13명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저걸 반드시 깨부숴야 해. 저것만 없으면 형산강을 넘어 포항 시가지를 탈환하기가 어렵지 않을텐데."

일명 연제근분대로 명명된 특공대 대장인 3사단 22연대 분대장 연제근 이등상사가 12명의 대원들을 독려했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북한군에 밀려 포항을 지키던 육군 3사단은 형산강 너머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적이 형산강을 넘어오면 울산을 거쳐 곧바로 부산이 위험해질 위기가 닥친다. 어떻게 해서든지 적을 막아내야 했고, 나아가 포항을 탈환해야만 북진이 가능했다.

형산강을 넘기 위해 3사단 소속 22, 23, 26연대가 숱한 작전을 펼쳤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적의 기관총 진지가 워낙 강력해 강에 들어서면 국군은 총알세례를 받다가 죽거나 물러섰다.

북한 주력부대가 포항에 입성한 날이 8월 11일이니 한 달 1주일째 접어들 무렵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을 탈환하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때 연제근 이등상사가 나섰다. "특공대를 조직하여 기필코 기관총 진지를 궤멸시키겠습니다." 이리하여 나선 대원이 그를 포함한 13명.

어둠 속에서 기습을 해야만 했기에 새벽에 각자 멜빵 가득히 수류탄과 탄띠를 찬 채 형산강에서 가장 강폭이 좁고 수위가 낮은 형산교 서쪽 장흥동 부근에서 조용히 강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강을 거의 건넜을 무렵 어김없이 2정의 적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수도 없이 아군을 죽인 그 기관총이었다. 특공대원들이 순식간에 쓰러져갔다. 강물은 다시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강물 바닥에 엎드려 포복을 해갔지만 강 북쪽에 도달했을 때 남은 대원은 연 대장을 포함해 3명뿐. 그도 왼쪽 어깨 관통상을 당한 상태였다. 2명이 앞에서 응사를 하는 동안 진지 뒤로 돌아간 그는 남아 있던 3발의 수류탄을 적 진지에 까넣었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국군의 형산강 도하를 그토록 괴롭히던 기관총 2정이 날아갔다. 하지만 연 대장과 함께 남은 2명의 대원도 적의 포탄에 쓰러졌다.

이들이 목숨을 내던진 사투를 목격한 3사단 장병들은 내남없이 돌격에 나섰다. 기관총 세례가 없으졌으니 육탄전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연 대장을 비롯한 특공대원들이 산화한 10분 뒤 마침내 북한군은 패주했다. 정부는 연제근 이등중사의 무공을 기려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고 2계급 특진시켜 연제근 상사에 추서했다.

아쉬운 점은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무공을 세운 나머지 특공대원들은 이름조차 알 수 없으니 이런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최정암기자 jeongam@ma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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