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낙동강 시대] <27>문경 봉생마을(1)

입력 2011-01-19 07:32:11

봉생마을 지도
봉생마을 지도
일명 바가지샘으로 불리면서 상수도가 생기기 전까지 주민 식수원이었던 봉생샘과 이를 지켜온 향나무.
일명 바가지샘으로 불리면서 상수도가 생기기 전까지 주민 식수원이었던 봉생샘과 이를 지켜온 향나무.
서애 류성룡 선생이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세운 정자, 봉생정.
서애 류성룡 선생이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세운 정자, 봉생정.
봉생정에서 바라본 영강과 독산. 조령천과 합쳐진 영강이 휘돌아가는 지역에 소나무숲(진남숲)이 무성하다.
봉생정에서 바라본 영강과 독산. 조령천과 합쳐진 영강이 휘돌아가는 지역에 소나무숲(진남숲)이 무성하다.

곤두산에서 봉황 세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한 마리는 마을 앞 정자등 정상에, 다른 한 마리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독산 기슭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또 한 마리는 마을 바깥으로 날아갔다.

500여 년 전, 안동 권씨 가문의 한 상주가 묏자리를 찾기 위해 곤두산에 올랐다. 한참을 헤매다 양지바르고 대나무 숲이 무성한 곳을 찾아냈다. 명당이었다. 하지만 대나무 숲에서 묘를 파던 중 넓적한 반석을 발견한 것. 상주와 몇 사람이 넓고 평평한 바위를 들어내자, 바위 밑 공간에서 갑자기 봉황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고 한다. 봉황이 정자등에 앉은 자리는 봉생정, 독산 기슭에 앉은 자리는 새정자, 마을 바깥으로 날아가 앉은 곳이 봉명탄광이 있었던 봉명산이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3리 봉생(鳳笙)마을. 대나무 숲에서 봉황이 날았다고 '봉생'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은 상주 화북면 장암리에서 발원한 영강이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 조령에서 발원해 흘러내린 조령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화북면 장암리에서 흐른 농암천(가은천),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 조령천 등 세 물길이 합쳐진 것이 영강이다. 영강은 다시 경북팔경 중 제1경인 진남교반을 돌아나와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봉생마을 동남쪽 바로 앞에는 영강이 조령천을 합류해 독산을 휘돌아 나가고, 뒤편 서북쪽에는 곤두산과 탑산이 우뚝 솟아 있다. 봉황이 정자와 샘, 들판을 만든 봉생마을은 영강과 인근 산이 빚어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6·25와 탄광 개발의 아픔과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봉황이 만든 정자와 샘, 들판과 다리

마을에는 봉생이란 이름을 가진 지명과 흔적이 숱하게 남아 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영강과 조령천, 독산이 빚어낸 기암절벽과 소나무 숲을 즐겼다는 '봉생정', 지하수를 개발하기 전까지 마을 우물로 사용됐던 '봉생샘'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의 가장 넓은 경작지인 '봉생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문을 연 '봉생탄광', 마을 입구 다리 '봉생교'에 이르기까지 봉생이란 이름은 마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마을 앞 야트막한 야산, '정자등'. 남동쪽 바로 앞은 조령천과 영강이 합쳐진 물길이 독산을 휘돌아가는 지점이다. 이곳에는 물길이 합쳐지면서 생긴 깊은 '납작소'와 소나무가 우거진 '진남숲'이 절경을 뽐내고 있다. 1583년, 조선 중기 학자인 서애 선생은 바로 이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등에 '봉생정'을 지었다. 고향인 하회마을을 오갈 때 자주 봉생정에 들러 숲과 절벽과 물길을 만끽했다는 것.

백운사 주지 법안(72) 스님은 마을 이름의 유래를 곤두산 봉황이 아니라 서애 선생의 옛 자취에서 찾기도 한다.

법안 스님은 "서애 대감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때 이 정자에서 하룻밤 잤거든. 영의정은 옷 앞에 학이 있제. 이걸 학이라고 안 하고 봉이라고 했는 거라. 그래서 봉이 여기 와서 하룻밤 잤다고 해서 봉생이라는 이름이 생긴 거라"라고 말했다.

마을 중앙에는 500여 년 동안 주민들의 목을 축였던 우물과 200여 년 이를 지켜온 향나무가 마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마을이 생길 무렵부터 있었다는 봉생샘은 지금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물을 뿜어내고 있다. 지하수를 끌어올린 간이 상수도가 생기면서 주민들은 이제 이 우물을 식수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지금도 바가지와 함께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50년쯤 심은 향나무도 이 우물을 꿋꿋이 지켜오고 있다.

권영섭(62) 씨는 "바가지 샘이라고 그렇게 불렀잖아. 옛날에는 다 그거 먹었지. 지금은 물이 좋은 게 있으니까 안 먹지. 그래도 우물을 막으면 말 못하는 벙어리가 난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와 여지껏 우물을 막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 거지"라고 했다.

봉생들은 비록 주민들의 먹을거리를 충분히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봉생의 최대 경작지이고, 봉생교는 주민들이 피땀 흘린 마을 도로 건설의 대가로 받은 다리이다. 봉생은 그렇게 정자에도, 우물에도, 들판에도, 다리에도 그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다.

◆주민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탄광

봉생 사람들은 마을 크기에 비해 논밭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마을의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경작지인 '봉생들'이 고작 논 180마지기(3천600평)에 불과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의 주요 생계터전은 탄광이었다. 일제시대 개발됐다 한국전쟁 이후 다시 조업을 시작한 문경지역 탄광과 마을 주변에 새로 개발된 광산이 1980년대 후반까지 봉생 주민들의 주요 일터였다.

주민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대성광업소, 은성탄광, 봉명광산 등 규모가 큰 세 개의 탄광이었다. 이와 함께 마을 서북쪽 곤두산 자락 '화석굴'과 뒷산 '봉생탄광'은 마을에 딸린 일터였다.

봉생탄광은 규모가 작은 탓에 외지인들은 거의 없고 광부 대다수는 마을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봉생탄광 관리자였던 김정욱(65) 씨는 "석탄하고 무연탄을 캐내 기차로 서울하고, 전라도로 갔다"며 "1976년에 문을 열어 인부가 많을 때는 60~70명 정도 됐는데, 매장량이 적어 9년 뒤인 1985년 6월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약 3년 동안 봉생탄광에서 일했던 권영섭 씨는 "양이 많으면 수월하게 탄을 캐내는데, 탄이 없으면 발파를 해야 해. 발파로 깨진 돌을 치우고 다시 탄을 캐야 해서 힘은 배로 들었다"며 "그래도 하루 일당 5천원으로 괜찮은 편이었어"라고 했다.

곤두산 자락 화석굴은 백토와 철광석, 아연 등이 매장돼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서간석(64) 씨는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채굴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서 씨는 "9~10살 때 아버지가 광산 책임자였고, 나는 연장 같은 거 갖다 주고 심부름을 했어"라며 "분필처럼 그 돌로 그려보면 그려져요. 돌을 부숴 가루를 얼굴에 바르면 뽀예"라고 말했다. 또 "화석굴에서 철광석도 6년 정도 채굴했는데, 청주 가서 제련을 하고 불정역에 실어내서 열차로 탄을 운반하고 했다"고 말했다.

광부와 그 가족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사고 위험과 고된 노동, 과잉 소비 등을 통해 숱한 아픔과 굴곡을 경험해야만 했다.

탄광에서 고되게 번 돈은 대부분 살림살이와 자식 교육에 사용됐다. 하지만 농사일보다 훨씬 수입이 좋았던 일부 광부들은 돈 씀씀이가 헤프기도 했다.

권영하(79) 씨는 1950~70년대 광산 활황기 모습을 설명했다.

"진남교 여게(여기에) 술집이 아홉 집이 있었어요. 대성탄광, 은성탄광, 거기 광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동네 돈 쓸 데가 없고, 일해가 돈만 생기면 술 먹고. 대구 서문시장도 문경 아니면 장사가 안 됐는데 뭐. 서문시장 물건이 여기 다 왔어. 얼굴 시커멓게 하고 가도, (광부) 작업복 입고 술 먹으면 외상을 다 줘요."

당시 술집에는 얼굴이나 옷에 탄을 묻히고 가면 훨씬 더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탄광 일은 주민들에게 일거리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봉생 사람들은 1986년 큰 아픔을 겪었다. 대성광업소에서 광산이 무너져 내려 권칠순 씨의 남편과 권영하 씨의 동생이 목숨을 잃은 것. 당시 구조대는 지하 800m까지 내려가 이틀 만에 이들을 구조했지만, 이미 무너져 내린 돌과 흙에 부딪혀 숨을 거둔 상태였다는 것.

탄광은 주민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준 일터였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