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손글씨… 터치 스크린·자판에 밀려난 친필 문화

입력 2011-01-15 09:00:00

디지털 세대는 손글씨을 멀리하고 있다. 삐뚤삐뚤. 괴발개발 쓴 글씨도 알아볼 정도만 되면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디지털 세대는 손글씨을 멀리하고 있다. 삐뚤삐뚤. 괴발개발 쓴 글씨도 알아볼 정도만 되면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글씨 잘 쓸 필요 있나요? 펜도 없어요. 터치(Touch) 시대인데…."

손으로 쓰는 글씨가 사라지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방증이다. 중국 당나라 때는 관리를 선출하던 네 가지 표준, 즉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었다.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 네 가지를 통틀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며 이를 중시했다. 불과 20년 전에만 해도 글씨는 여전히 채점관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다.

글씨를 잘 못 써서 받는 스트레스는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냐도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됐다. 오히려 왼손잡이들이 운동신경이나 예능에 더 재능이 많다고 각광을 받는다. 삐뚤삐뚤, 괴발개발 쓴 글씨도 알아볼 정도만 되면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에 더해 디지털 세대는 손글씨를 더욱 멀리하고 있다. 모든 것이 터치로 시작해서 터치로 끝이 나니, 손으로 직접 써야 할 글씨는 많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컴퓨터 자판을 통해 해결되다 보니 타인에게 자신의 악필이 노출될 필요도 없다. 심지어는 연하장이나 카드, 편지도 프린터로 출력해서 붙이다 보니 굳이 손가락에 힘줘 가며 애써 글씨를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손으로 쓰는 글씨가 꼭 필요하지 않은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글씨는 터치와 컴퓨터로 넘어갔다

"글씨 잘 쓰는 아이들이 없고, 글씨 잘 쓰는 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대구 서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가 하는 말이다. 예전 같으면 '넌 왜 그리 글씨를 못 쓰느냐?' '글씨가 삐뚤면 마음도 삐뚤어진다' 등 꾸지람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풍경이 사라진 지 오래다. 6살, 7살만 돼도 컴퓨터 자판을 칠 수 있으며, 마우스를 들고 이곳저곳을 클릭하며 자신이 필요한 곳에 찾아간다.

실제로 그렇다. 어린이집뿐 아니라 초·중·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손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넷북이나 노트북 등을 이용, 곧바로 타자를 치는 것이 디지털 시대의 필기며, 이미 해당 과목의 컴퓨터방에 들어가면 수업자료들이 다 올라와 있다. 굳이 필기를 한다면 교수님이 얘기하는 중요 단어나 자신이 쓰고 싶은 말을 몇 마디 끼적거리는 수준이다.

경북대 심리학과 김지호 교수는 "교수들에게 칠판이 사라졌듯, 학생들에게 펜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며 "리포트 역시 한글이 아닌 파워포인트로 넘어가 글씨와도 더 멀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모든 게 손터치로 해결되다 보니 엄지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다. 펜을 잡는 지지대 역할을 했던 엄지는 지금은 터치 시대의 대장 역할을 자처하며 자판을 칠 때뿐 아니라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우편물이 와도 전자펜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아 볼펜을 잡을 일이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대구시청 한 서기관은 "불과 5년 전부터 하루에 출근해서 실제 한 문장도 제 글씨로 쓰는 일이 잘 없으며, 모든 것을 컴퓨터가 대신 해 준다"며 "시대의 변화가 워낙 빨라서 다시 글씨의 시대가 올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손글씨는 휴먼 아날로그 매체

"요즘 광고에서 유행하는 초코파이 광고의 '정(情)타임'처럼 글씨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 녹아있고, 인간적인 냄새가 담겨있습니다. 인류가 아무리 변해도 손글씨는 영원합니다."

아직도 손글씨를 잘 쓰고, 결코 컴퓨터로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본지의 시사상식 '텐' 코너에도 대다수가 컴퓨터 이메일을 통해 퀴즈 응모를 하지만 아직도 정성스레 쓴 글씨가 담긴 엽서나 편지 형식으로 보내는 이들이 적잖다. 퀴즈 애호가 김찬호(38·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씨는 "디지털 시대는 터치가 대세지만 그래도 그 감성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날로그식 글씨"라며 "한글 워드로 간단하게 쳐서 이메일로 보낼 수도 있지만 일부러 직접 글을 써가며 풀어보고, 엽서에 써서 응모한다"고 말했다.

'필기왕, 노트 정리로 의대 가다'의 저자 김현구 씨는 차근차근 노트 필기만 잘해도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 씨는 "과거의 성적은 기억 속에 묻어두고 지금 당장 노트 필기를 시작해보자. 기적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며 "직접 써가며 꾸준히 성실하게 준비한다면 컴퓨터 세대의 편리함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저자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노트 정리 덕분에 세 자리 등수를 1년 만에 전교 1등으로까지 끌어올리며 간절히 원하던 의대 진학의 꿈을 이루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노트 정리하는 자신의 공부비법을 디지털 시대의 속도와 대비되는 슬로 스터디라고 명명하고 있다.

글 잘 쓰는 법에 대한 논쟁도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컴퓨터와 글로 쓰는 것은 차이가 많다는 것. 하지만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되도록이면 수첩에 스스로 적어가면서 글을 쓰는 것을 추천한다"며 "먼저 자신의 글씨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컴퓨터에 앉아 개요를 잡고 글을 다듬어가는 것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이라고 조언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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