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자연사박물관을 대구경북에 만들자

입력 2011-01-14 11:02:03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이 남태평양 타히티에서 임종 직전에 그린 작품명이다. 고갱이 이런 질문을 제기했을 때, 그는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말의 '역사적 시간'뿐만 아니라, 지구의 나이에 해당하는 '지질학적 시간'에 대해서도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고갱의 우주론적 문제 제기는 어느 때보다도 기후 변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한국의 대학에서도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는 폴 크루첸 박사가 지구가 산업혁명 이래로 '인류세'(Anthropocene)의 지질학적 시간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인류세를 수용하게 되면, 사람의 행위는 문화적, 생물학적, 지질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인간은 지질학적 행위자로서 문명과 지구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인류사(人類史) 중심의 역사는 지구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질학적 시간에 초점을 둔 자연사(自然史)는 인류사와 함께 인류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는 데 한쪽 수레바퀴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게 자연사의 중요성이 점점 커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자연사에 대한 교육과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인류사조차도 교양 교육에서 배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사를 정규 교과과정에서 배우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을 것이다.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뉘어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의 역사학계 풍토에서 자연사는 '역사학'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자연사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갈 수 있을까. 자연사박물관이야말로 바로 이런 물음에 속시원한 대답을 던져줄 수 있는 훌륭한 대중적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

유럽의 경우를 보자. 영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런던자연사박물관은 유럽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적으로도 런던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수준 높은 자연사박물관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나라들은 이미 19세기 말에 각각 100여 개 이상의 자연사박물관을 갖고 있었다. 유럽 사회는 이렇게 한 세기에 걸쳐 자연사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물론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없다. 그냥 몇몇 지방자치단체들과 대학들이 운영하는 자연사박물관이 있을 뿐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생들이 방학이면 부모의 손을 잡고 같이 가고 싶은 변변한 자연사박물관이 하나 없는 나라이다. 사태는 자못 심각하다. 전 세계적으로 감동을 주었던 영화 '아바타'는 어릴 때부터 자연사박물관을 다니면서 자라났던 사회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3D 영상물과 같은 기술의 진화도 자연사의 상상력에 의해 뒷받침될 때 멋진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자연사가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인간은 철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런데도 유교적 전통이 워낙 강했고 아직도 이 전통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성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을 지질학적 행위자로 바라본다니! 유럽 사회는 어떨까. 빈의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 천장에 자연사가 고생물학, 지질학, 광물학, 선사학, 민속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의 8개 학문 분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자연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지질학적 존재성을 전제로 한다. 게다가 자연사는 특정 학문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융합 학문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가로 발돋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가. 이웃 나라의 관광객들이 서울, 부산, 제주만을 돌아보지 않고 자연사박물관 하나만으로도 대구경북을 찾으려고 한다면, 세계에 내놓을 문화 브랜드로 자연사박물관을 이 지역에 만드는 것을 한번 꿈꾸어볼 만하지 않은가. "나에게 자연사박물관을 달라, 내가 세계를 들어올릴 것이다."

이종찬(아주대 교수·문화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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