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나리봇짐 지고 짚신 매단 선비들 과거 보러 '에헴∼'
조선시대 한양으로 이어지는 구미 무을면 안곡리 길은 낯선 나그네에게 발길을 호락호락 열어주지 않는다. 가슴팍을 파고드는 칼바람과 흰 눈이 소복이 내려 걸어온 발자국을 차근차근 되새김질하게 한다. 걸어온 길의 흔적은 역력했다. 발자국마다 이슬이 맺히듯 눈송이들이 뭉쳐진다.
한양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 낸 '표식'이다. 길 위에서 명멸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길은 그렇게 남아 있다. 다음 세대로 쉬엄쉬엄 넘어가는 길의 끈질긴 생명력이 보인다.
▲한양으로 가던 길
벌써 이 길을 세 번째 걷는다. 과거를 보려는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달아매고 걸었던 길이다. 지금은 현대화란 미명 아래 일부는 사라지고, 아스팔트로 포장이 돼 있다.
무을면 안곡리 옛길은 들어오는 길이 두 갈래이며, 한양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이다. 우선 12㎞가량 떨어진 선산 화조역에서 오는 길과 김천 개령 쪽에서 우태산(옛 복우산) 이티재를 넘어오는 길이 있다. 이 길을 거쳐 온 한양 나들이객들과 선비들은 무을면 안곡리에서 하루 밤을 지낸다.
안곡1리 마을을 통과해 삼시봉(구미·김천·상주시 경계산) 길마재를 넘어 추풍령으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또 연악산 지류 흰티재를 넘어 상주 청리면을 지나 추풍령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두 개의 길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들이 꺼리는 길이었다고 한다.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국도 68호 선으로 길이 나 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수다사에서 안곡2리 송정지를 휘감고 돌아 문경새재로 가는 길만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산 속에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남아 있는 오솔길이 조선시대 500년을 지나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해오고 있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연악산을 넘어가는 임도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애환이 얽히고설킨 안곡리 옛길은 이렇게 우리들 기억 속에 묻혀 사라지고 있다.
신작로에 이어 국도와 지방도·군도가 생겼고, 첨단을 달리는 고속도로와 철길이 모습을 드러내는 등 많은 길이 생겼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사람이 걷는 길'은 용케도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은 소통과 나눔을 말하고 있다.
구미시 남영우 무을면 부면장은 "안곡리 옛길이 무을저수지 중간을 관통하는 데 1960년대 무을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옛길이 끊겼다"며 "한양으로 이어지는 안곡리 옛길이 문헌에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 흔적을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기억을 더듬어 겨우 일부를 찾았다"고 말한다.
▲꽤 번성했을 듯한 안곡역
구미 무을면 안곡리에 들어서면 마을 앞에는 무을저수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이 무을저수지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평안해 보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겨울 호수의 수면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온 탓인지 더욱 하얗게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6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5그루가 떡 버티고 있다.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안곡리의 또 다른 이름은 안실(安室)이다. 역마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선산 화조역 및 김천 개령과 상주 청리역 및 문경새재를 이어주는 안곡역이 있었던 곳이다.
김천 찰방 관할로 남쪽으로 개령 양천역, 북쪽으로 상주 청리역으로 이어지는 당시 안곡역은 중마 2필, 하마 4필, 역리 62인, 노 20인, 비 5인을 거느린 경북도 서북쪽의 주요 역 중의 하나였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 마을 우물을 마시고 청운의 꿈을 품었을 것이다. 또한 나그네들은 말의 짐을 풀어 쉬어가곤 했었다. 이 마을에는 당시의 역사를 증빙시켜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우물은 바위 틈에서 물이 나와 물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성황당 터가 아직 자리 잡고 있다. 과거시험 합격을 기원하며 돌탑을 쌓았던 선비들의 정성이 묻어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꽤 번성했을 듯하다. 1960년대까지 이곳 마을에는 마방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강창석(73) 안곡1리 이장은 "60년대까지 선산 우시장에서 소를 몇 마리씩 사서 김천과 상주로 넘어가려면 마방에서 하룻밤 묵고 갈 정도였다"며 "500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아직 안곡역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어 마을 주민들이 복원을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무을면에는 안곡역과 얽힌 지명들이 많다. 무을면 오가 2리는 말발티로 불렸다. 말발굽을 갈아 주던 곳이다. 대장간도 꽤 컸다고 한다. 또 고을 원님들이 쉬어 간다고 해서 원리라고 불리는 동네도 있다. 안곡 1리 마을 입구에는 고관대작들이 오면 길 옆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굴복이란 곳도 있다.
잠시 삶의 고단함을 우물가에 풀고 시 한 수 읊조릴 만하다. 조선 중종 때 일명 무릉도인으로 불렸던 주세붕은 '안곡역'이란 시를 지었다.
'매년 안곡역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이나 역 앞으로 흐르는 물을 길었던가/
머리 위에는 구름이 흘러가고/ 시 구절 고치니 어느새 가을이 되었네/
벼슬아치들은 말이 병들었다고 나무라고/ 우리들은 손님 많은 것을 원망하네/
잠깐 등불 앞에서 쉬어/ 고금의 시름 유유히 흘러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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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숨결이 살아 숨 쉰 곳
구미 무을면 안곡리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안곡리에는 조선시대 대문호 2명과 박해받던 천주교 역사의 단편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천주교 선교 초기 교우촌이 있었고, 1850년대 2년 동안 우리나라 2대 신부인 최양업(토마스·1821~1861) 신부가 16·17번째 서한문을 작성해 르그레주아·리부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는 최초의 천주교 신학생이며 두 번째로 사제가 됐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한국 천주교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김대건 신부 못지않을 만큼 소중한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매년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써 스승 신부들에게 19통의 서한문을 보냈다. 이중 16·17번째 서한문을 안곡리에서 작성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 박해가 가장 심했던 1850년대 5개 도에 걸쳐 100개가 넘는 광활한 전교 지역을 돌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맡아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순방길에 나섰다.
그렇지만 7천 리를 걸어다녔던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이 기간 동안 안곡리에서 2년여를 머물렀다. 안곡리 마을 어딘가에는 최양업 신부의 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구미·전병용기자 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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