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낙동강 시대] <26>안동 지리(2)

입력 2011-01-12 07:48:48

봄엔 복사꽃, 가을엔 단풍이 아름답다. 눈 덮인 겨울풍경도 절경이다. 낮에는 갈대 눕는 소리, 밤엔 두견새 우는 소리가 살갑고 구슬프다. 아침 해와 저녁 반달이 곱게 비추는 마을. 반변천 깊은 소(沼)와 강변 하얀 모래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다.

주민들은 400년을 훌쩍 넘겨서도 이름 모를 조상을 잊지 않는다. 양지바른 곳에 직접 초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댐 건설로 고향의 절반을 잃은 초교 동창생들은 인터넷 카페에서 추억과 향수를 달랜다. 안동시 임동면 지리.

조선말까지 임하현에 속했던 지리는 고종 32년 임남면에 편입됐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지동, 하지동, 검단리 일부를 합해 '지동'이란 이름으로 길안면에 속했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임동면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 안동군과 안동시가 도농 통합시로 바뀌면서 지동이 '지리'로 이름을 굳혔다.

지리는 사위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와 다름없다. 외부 간섭을 받지 않고, 강과 들에서 풍부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어 사람 살기에 적당한 곳이다. 아가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안동수성장으로 공을 세운 운천 김용 선생과 부인 이 씨의 묘가 있고, 마을회관 옆에는 운천 선생 신도비와 제사용 건물인 '운천재사'가 있다.

주민들은 마을 유래를 약 500년으로 잡고 있지만, 고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도 있다. 아름다운 생태자원, 따뜻한 민심, 유구한 역사성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1500년, 금동관의 추억

1989년 여름, 지동(현 지리)의 한 무덤을 발굴하던 경북대 조사팀은 경악했다. 아가산 기슭 지동 2호분을 파던 중 '山'자가 겹쳐진 모양의 금동관을 발견한 것이다.

임하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 중이었다. 당시 지동에는 고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9기가 있었다. 새밤마을에서 아가산 서쪽 기슭을 타고 남으로 내려간 뒤 동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이다. 지금은 수몰로 사라진 밀미마을 앞 아가산 자락인 셈이다. 아가산은 아카시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무덤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해 쇠띠(鐵輪), 쇠칼(鐵刀子), 청동철사, 쇠방울(鐵鐸) 등이 발굴됐으나, 무덤 주체와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조사팀은 다만, 무덤이 형성된 시기를 500년대(6세기)로 추정했다.

지동 2호분 발굴에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은 금동관의 모양과 무덤 축조 시기다.

금동관은 가야나 백제 양식보다 신라 양식에 가깝다. 대가야의 관은 풀이나 꽃 모양 장식에 양파모양 봉오리를 한 초화보주형(草花寶珠形)이고, 백제식 금동관도 풀꽃 형태의 장식에 양파 모양이 곁들여져 있다. 신라 관(冠)이 '날출(出)'자나 새 날개 모양의 솟을 장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동 2호분 금동관은 신라양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덤 축조 시기로 봐서도 지동의 세력은 신라 소국이나 마을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6세기는 삼한시대에서 고대국가로 넘어간 시기였다. 신라가 경북지역 진한 소국들을 대다수 편입하고, 변한에서 발전한 대가야까지 복속(562년)한 무렵이다.

결국 지동 2호분은 축조 시기나 금동관 형태로 볼 때 진한 소국 중 신라로 편입된 공동체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주민들은 약 500년 전부터 지리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지만, 지동의 고대무덤을 감안할 때 약 1천500년 전에도 사람이 정착해 살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양지바른 곳의 마을학교

지양(枝陽)초교. 1965년 '지리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지은 초등학교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은 학교가 아니다. 주민들의 손으로 설립한 '마을 학교'였다.

지리 사람들은 옛날 산 너머 안동 길산초교에 다녔다. 중학교는 청송 진보로 갔다. 특히 길산초교로 가기 위해서는 산과 고개를 몇 굽이나 돌고 넘어야 할 정도로 불편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자녀들을 위해 직접 학교를 짓기로 한 것이다.

학교 터는 새밤과 원지 사이 볕이 잘 드는 중앙에 마련했다. 건립자금은 '영세불망지묘'의 주인이 남긴 마을 공동 땅 일부를 팔아 마련했고, 기성회를 만들어 거둔 찬조금을 보태 충당했다.

"회원을 모집해서 기성회를 만들어 가지고, 그 사람들이 돈을 할당을 해가지고. 그래도 돈이 태반이 모자란 거라. 그래가 불망답(영세불망지묘 주인이 넘겨준 논) 그 토지에서 천몇백 평을 팔았어, 개인한테. 땅만 하면 되나. 공사비가 또 들어야 되기 때문에 세멘(시멘트) 아니고 나무로 지었지. 산 있는 사람들이 좋은 나무를 기증한 거라. 우리는 인력으로 톱 가지고 베 내라(내려) 놓으면, 그걸 제재를 하는 거라. 그걸 또 학부형들이 져 날랐는 거라."

이병호(70) 씨는 흙으로 학교 터를 고르고, 나무를 기증하고, 그 나무를 베 옮긴 뒤 다듬어서 건물 기둥을 올리는 등 자금 마련부터 시공까지 주민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소매를 걷어붙였다고 했다. 건립에만 꼬박 3년이 걸린 길산초교 지양분교는 3년 뒤 독립된 '지양초교'로 인가받았다. 교사 수가 모자란 탓에 주민 몇 명은 8개월가량 무보수 마을교사로도 활동했고, 초창기에는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점심을 준비하기도 했다.

피금난(70) 씨는 "80년대부터 급식을 했지. 학부형들이 급식비에다 얼마씩 보태 재료를 사 급식했는데, 경제가 나아져 내가 조리사로 일했지. 나중에 나하고 학부모, 영양사하고 서이(세 명이) 그래 했어"라고 말했다.

170명까지 모였던 지양초교는 30년을 지나는 동안 학생 수가 점차 줄어 1995년 결국 문을 닫았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지양초교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지금은 졸업한 동창들이 인터넷 카페에서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논으로 바뀐 밭

지양초교 건립과 함께 1975년 시작한 농경지 정리사업으로 지리는 변화의 물결을 탔다.

지리의 농토는 마을 앞 아가산을 개간한 밭이 대부분이었다. 콩과 보리가 주 작물이었고, 담배를 재배하는 농가도 있었다. '한 집에 논 서마지기가 있으면 부자'라고 할 정도로 논은 드물었다.

하지만 농경지사업 시범지구로 선정되면서 농업환경이 크게 바뀌게 된 것. 정부 지원금을 보태 길을 내고, 밭을 논으로 바꾸는 작업은 2년가량 계속됐다. 농경지 정리로 논 80㏊가 새로 생겨났고, 늘어난 벼 수확량을 처리하기 위해 추곡수매장이 들어섰다.

농업용수도 이전엔 아가산 앞 지양못에서 끌어다 썼지만, 늘어난 논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양수장을 건립했다. 디딜방아나 기계식 방앗간이 사라지고 대규모 정미소가 생겨났다.

김연동(73) 씨는 "정부에서 돈을 해가지고,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있었지. (농경지 정리) 시범지구가 돼 가지고 밭을 논으로 바꾸고. 그 땜에 전기도 일찍 들어왔어. 양수장이나 정미소에 전기가 필요하잖아"라고 했다. 경지정리사업이 지리의 먹을거리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아름다운 여덟 풍광

지리에는 예로부터 8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회자됐다. 옛 마을지는 단등추풍(丹登楸風), 종산두견(鍾山杜鵑), 갈전백화(葛田白花), 무릉도원(武陵桃原), 미산반월(眉山半月), 쌍경어유(雙鏡魚游), 오봉조일(梧奉朝日), 사호백사(沙湖白沙) 등을 '지동팔경'이라고 했다.

지촌교 건너 외살산(악산) 단등골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아가산 뒤편 종산(鍾山)에서 밤에 우는 두견새소리가 구슬프고, 칡이 많은 갈마들의 하얀 갈대밭이 장관이었다. 지리 양수장 건너 '무리' 마을에 피는 복숭아꽃이 눈길을 모으고, 반달이 미산(眉山)을 비추는 밤풍경이 아름다우며, 갈바들(葛田) 앞 반변천 소(沼)가 맑아 물고기 뛰노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한다. 또 지촌교 건너 산 너머의 아침 해가 장관이고, 종산 앞 반변천변 하얀 모래가 눈부셨다는 것.

임하댐 건설에 따른 갈바들의 수몰로, 지금은 지동팔경 가운데 사호백사, 갈전백화, 쌍경어유가 사라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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