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경인년이 저물어간다. 경인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정은 천차만별이다. 만족한 한 해를 보냈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쉬움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한 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또 무엇인가를 기원한다. 새해를 앞두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사람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곳에서 시민들의 새해 소망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보물 제431호 팔공산 갓바위의 정확한 지정 명칭은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이다. '정성껏 빌면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고 알려지면서 연간 1천200만 명 이상이 찾고 있다. 유명세를 반영하듯 평일(21일) 오전 갓바위를 찾았지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갓바위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벌써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을 갓바위로 이끈 원동력은 염원이다. 팔공산 갓바위를 오르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산이 좋아서, 건강관리를 위해 찾은 사람도 갓바위를 마주 대하면 한번쯤 고개를 숙이고 기원을 하게 된다.
주차장에서 갓바위까지 거리는 2㎞다. 주차장을 조금 오르면 나타나는 관암사에서 갓바위까지는 900m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사가 급해 어지간한 체력이 아니면 쉬지 않고 단숨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관암사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이 하나의 고행길처럼 다가온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돌계단을 따라 40~50여 분 오르면 갓바위다.
갓바위에 오르면 다양한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간단하게 합장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주를 하거나 정성스럽게 108배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 염주를 돌리며 염불을 외는 사람, 갓바위 효험을 담아가기 위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갓바위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모두 갓바위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건강이 최고
갓바위에서 만난 시민들이 최우선으로 꼽은 새해 소망은 단연 건강이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정혜경(40·여·대구시 달서구 두류동) 씨는 3개월 전부터 매주 한 차례 갓바위를 찾고 있다. 퇴근 시간이 늦어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내지 못해 쉬는 날 갓바위를 찾게 되었다는 것. 코스가 길지 않고 축원도 할 수 있어 갓바위를 등산 코스로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올해를 돌아보면 큰 탈 없이 무사히 잘 보낸 것 같습니다. 새해 소망은 하는 일 잘되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건강했으면 하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갓바위는 전국적인 명소다. 지역 사람뿐 아니라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용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달에 한 번 관광버스를 타고 갓바위를 방문한다는 권영자(58·여·부산시 사상구) 씨는 "얼마 전 딸이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는데 오늘은 감사의 배를 올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소망 역시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고 했다.
◆"부자 되게 해주세요"
시간 날 때 가끔 갓바위를 찾는 정운영(40·대구시 달서구 장기동) 씨의 새해 소망은 로또복권 당첨이다. 조금은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이 땅에 사는 서민들이 한 번쯤 꿈꾸어본 소망인 셈이다. 정 씨는 매주 5천원씩 로또복권을 구입하고 있다. 로또복권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몇 년 전 직장에 불어닥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여파 때문이다.
그가 로또복권을 통해 얻는 것은 희망이다. 혹시나 하고 샀다 역시나 하고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1주일 동안 희망의 불씨를 품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박봉의 샐러리맨들이 현실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늘 돈 걱정을 하며 살지만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기댈 곳 없는 서민들이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로또복권입니다."
정 씨는 꿈에서 로또복권 번호 6개를 봤는데 깨어보니 4개만 기억이 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나머지 2개 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한 그는 결국 꿈에서 점지받은 4개 번호를 두 달 동안 줄기차게 선택해 로또복권을 구입했다. 그런데 꿈에서 본 번호 4개가 당첨이 되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 그때부터 정 씨는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두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한번 점지를 받으면 자다 일어나 번호를 적기 위해서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행이라도 잡으려는 정 씨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고 나의 모습일 수 있어 씁쓸했다.
구미에서 온 30대 부부도 새해 소망 가운데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산을 좋아해 여러 번 갓바위에 온 남편과 달리 이번이 갓바위 초행길인 부인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남편 하는 일이 잘돼 돈도 많이 벌었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
전영미(45·여·울산시 달동) 씨는 108배를 드리며 울음을 떠뜨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절을 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이 난다고 했다. 불교 신도였던 그녀는 사정이 있어 개종을 했으나 마음 안정이 안 돼 다시 불교 신도가 된 경우다. "다시 불자가 된 이후 네 번째 갓바위를 찾았습니다. 새해 소원은 내년 고3이 되는 딸아이가 수능을 잘 봤으면 하는 것입니다."
편순덕(55·여·대구 서구 비산동) 씨가 매달 한 번 갓바위를 찾아 정성껏 축원을 하는 이유도 자식 때문이다. 그녀는 "자식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늘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아들이 중사로 제대를 한 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2년째 실업 상태에 있습니다. 내년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은 아들이 반듯한 곳에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나라가 평안해야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은 시민들의 새해 소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 가운데 나라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30년 동안 공직에 몸담았던 이광익(61·대구 수성구 범어동) 씨는 매일 갓바위 등산을 하는 갓바위 마니아다. 5년 전 운동 삼아 친구들과 갓바위를 찾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갓바위에 오른다. 습관이 돼서 하루라도 쉬면 오히려 몸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가정과 나라가 두루 평안해야 서민들의 삶도 행복해집니다. 새해에는 어수선한 나라가 좀 안정이 되었으면 합니다"고 했다. 또 경북 군위에 거주하는 60대 어르신 3명도 이구동성으로 개인적인 건강과 함께 국가 안정이 새해 바람이라고 했다.
◆20세들의 새해 소망
갓바위를 찾는 사람은 노소 불문이다. 갓바위 정상에서 만난 손지영(여·인하공전 1), 정주원(여·영남대 1), 남아진(여) 씨는 스무 살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가끔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갓바위를 찾는다는 이들의 새해 소망을 들어보면 요즘 20세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재수생으로 정시 지원을 앞둔 남아진 씨는 대학 합격,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남자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 새삼 뜨고 있다는 정주원 씨는 장학금을 받는 것, 내년 대학 졸업반이 되는 손지영 씨는 취업을 새해 소망으로 꼽았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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