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머리염색과 의사

입력 2010-11-15 07:17:48

정형외과 교수가 하얗던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병원식당에 나타났다. 십 년은 더 젊게 보인다고 덕담을 하면서 "왜 염색을 했느냐?"고 물었다. "환자를 더 보려고 했다"고 대답을 하면서 덧붙였다. "환자들이 그렇잖아요. 머리가 허연 사람이 수술을 한다고 하면 '저 의사 혹시 수술하면서 손이 떨리지 않을까? 저 의사 혹시 수술하다가 정신없이 무엇을 빼놓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염색을 했습니다."

맞는 말 같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가 허연 교수들은 소아과 교수들뿐이다. 그래서 그들한테 물었다. "소아과 교수들은 머리를 염색할 필요가 없겠네요. 애들이 할아버지라고 좋아할 거잖아요?" 그 말에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웃고만 있었다.

나도 머리 염색을 한다. 허연 머리를 환자들한테 보이는 것이 싫기도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서이다. 허연 머리가 거울에 비칠 때면 몸에서 온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별 볼일 없는, 꿈을 잃어버린 노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한의사협회에서 환자들이 선호하는 의사의 연령대를 조사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40대 의사를 가장 선호한다는 결과였다. 그것뿐만 아니고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경우도 있었다. 어느 유방암 환자로부터 자기를 수술할 훌륭한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주 수술도 많이 하고 인격도 훌륭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갑자기 그 의사분의 나이를 물었다. 육십이 넘었다고 하니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젊은 의사를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 지금은 전통과 경험보다는 새로움과 신속함이 주류를 이루는 세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면서 변화를 따라갈 여유가 없고 바뀐 것에 적응하기도 바쁘다. 나이가 들면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가 싶지 않고, 느리게 적응하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경험은 기억하는 지식이 아니고 몸에 밴 것이다. 그것들은 떠올려야 떠오르는 지식이 아니고 본능처럼 솟아오르는 지혜이다. 수술하면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노마지지(老馬之智)처럼 경험들은 어려운 일의 해결책을 찾아내어 거뜬히 풀어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머리가 허연 의사들도 병원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라. 모든 세태가 젊고 활기찬 것을 선호하는 시대인 것을. 결국은 정형외과 교수도, 나도 또다시 젊은 의사처럼 보이려고 머리 염색을 할 것이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만년 마흔아홉 살의 의사로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임만빈(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