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참 무심합니다. 한고비 넘어서면 또 한고비가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젠 정말 하늘에다 대고 악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이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또 내(김선희·42)게 암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죽는 것 따위는 겁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할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아예 머릿속에서부터 '죽음'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려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것밖엔 도리가 없습니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남편은 지난 4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한 지 50여일 만이었습니다. 암이 무서운 병이라고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세상을 뜰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처음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남편이 우리 곁에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감하지 못했죠.
남편은 울산에서 배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신용불량자여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신세라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당을 받으며 용접하는 일을 했습니다. 벌이는 많지 않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그래도 노동판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것보다는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대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힘에 부쳐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병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수시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기운이 없어 움직이질 못하겠다며 시름시름 앓아누웠죠. '혹시나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병원비가 무서워 진단받을 생각도 못하고 동네 약국에서 약만 사다 먹었습니다.
남편이 병원으로 실려간 것은 지난 3월 초였어요.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돈을 꿔 치료에 매달렸지만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해 갔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지 한달쯤 지났을까 황달이 오고 복수가 차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코앞에까지 엄습해 온 것이 보였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아빠 병실에서 재롱을 부리고 아빠 목에 매달렸죠. 그리고 4월 18일 새벽 남편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남겨진 것은 쌍둥이의 재롱뿐
이제 내게 남겨진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쌍둥이뿐입니다. 경희(가명·8·여)와 명수(가명)는 이란성 쌍둥이에요. 경희는 아빠의 장례식날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빠'를 부르며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가슴이 먹먹해졌죠.
하지만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인 것 같습니다. "아빠 어디 갔어?"라는 물음에 "간암으로 하늘나라 가셨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것 같지만 아빠의 부재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색종이를 접고, 만화를 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깔깔 웃음을 쏟아냅니다.
남편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방을 구해 이사를 하고, 아이들도 새 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죠. 아이들이 학교 가는 시간을 피해 식당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비로 나오는 60만원으로는 사글세 180만원의 방세를 마련하고 입에 제대로 풀칠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옷도, 준비물도 뭐든 두배로 드는 우리 쌍둥이. 혼자 힘으로나마 이 쌍둥이를 잘 키워내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나 역시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커왔기 때문에 아빠 없이 살아야 할 내 새끼들의 힘겨움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남편이 떠난 지 한달 만에 찾아온 유방암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죠. 식당일을 시작한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아프더니 가슴에 뭔가 딱딱한 게 만져졌어요. '유방암 3기'였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탄식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수술비는커녕 생활을 유지할 돈도 없는데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댁과 친정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댁에서는 "손자 손녀도 필요 없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매정한 대답만 돌아왔고, 친정엄마 역시 골다공증으로 투병 중인 상황이라 한창 손 많이 가는 아이들을 봐줄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먹고살기가 너무 힘이 들어 아이들이 갓 돌을 지났을 무렵 보육원에 보내려 했던 적이 있었지만 남편과 나는 "우리가 굶어도 아이들은 내 손으로 키우겠다"며 지금까지 근근이 버텨왔습니다.
또 이런 모진 결심을 해야 할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는데…. 아이들 걱정에 하늘나라에서조차 편히 발뻗고 쉬지 못할 남편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살 수 있으니까요.
내게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보물인 우리 쌍둥이. 저 아이들을 홀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덩이쯤은 거뜬히 견뎌내야 합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황수영 인턴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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