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만화집/수다 펴냄/1만2천800원
오월은 언제나 반가움과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유난히 긴 겨울을 이겨낸 꽃들의 희망도 그렇지만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까지 유달리 가족을 생각하는 날이 많아서였다. 해서 내게 오월은 활짝 핀 계절의 여왕이기도 하고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어버이날 아침이면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슴에 달아드리곤 했다. 누나들은 하루 전 문방구에서 파는 똑같은 카네이션을 몇 번이나 고른 뒤에 머리맡에 두고서 잠들었지만 아들은 늘 누나들의 카네이션을 빼앗아 다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이시곤 하셨지만 어쩌면 누나들에게는 그날도 딸이라는 서러움을 가슴에 새기는 날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누나들은 하나뿐인 남동생을 위해서 끊임없이 희생해야 했고 밥상 위에 올려진 하나밖에 없는 삶은 계란처럼 남자라는 이유는 마치 무한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의 기도조차도 아들만을 위한 것이었을 때, 누나들은 얼마나 절망했을까? 정말 어느 일순간 불에 데인 것처럼 부끄러웠다. 동생 때문에 공장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남의집살이로 그러다 결혼조차도 초라하게 치러야 했던 누나들을 볼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누나들에게 더욱 가난했던 어린 날의 부끄러움은 나이가 들어서도 채 갚지 못한 빚 때문이다.
『몹쓸년』은 김성희의 만화집이다. 서점에서 책 제목을 보는 순간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을 떠올렸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누나들이 조그만 잘못을 할 때마다 몹쓸년들이라고 타박했었고 때로는 자신의 가난을 푸념할 때도 그 호칭이 쓰이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몹쓸년』이 더욱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파도 같은 짜릿한 작품도 아니고, 천둥 번개가 치는 충격적이거나 감동적인 작품도 아니고 강렬하진 않지만 잊을 수 없는 그림자를 마음에 남긴다." 박재동 화백의 추천글처럼 책을 읽는 내내 옛날에 우리의 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딸들이 갖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어찌 보면 『몹쓸년』은 만화라는 장르가 가지는 장점, 즉 쉽고 강렬한 캐릭터를 배제한 탓에 너무도 밋밋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내가 하지 않은 것들 안에 어떤 행복한 삶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삶)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딸이어서 힘들었다. 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생각이 앞섰기에 불편했다"는 작가의 고백을 읽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금 누나들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했다. 몹쓸 남자들만이 가정의 중심이던 세월, 그네들의 체념이 낳았던 몹쓸년이라는 호칭이 너무도 가슴 시린 것은 아직도 여전히 몹쓸 남자이기 때문이다. 어버이날 고향집에 다녀왔다. 허리가 굽은 어머니를 보면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지난 날, 얼마나 많이 몹쓸 짓을 했는지 아팠다. 대구로 오는 길에 두 누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몹쓸 놈의 마음으로.
여행작가 ㈜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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