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솥을 걸었다. 헛간에서 가져온 마른 등겨는 불쏘시개로 영락없어 이내 아궁이 속 장작이 타올랐다. 하얀 연기가 지붕 위에서 춤을 추자 부뚜막과 우물가를 오가던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의 손길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 이번엔 하나 둘 친척들과 이웃집 아저씨들이 찾아들었다. 약속이나 한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손에는 보따리를 들었다. 할머니의 환갑잔치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집안 곳곳에 내내 사람들이 넘쳐났고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밤마다 새우잠을 자야 했지만 왠지 설레고 주전부리까지 넉넉해 신나고 즐거웠다.
아마 잔치가 끝날 무렵 찍었던 듯하다.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30년을 훌쩍 넘긴 한 장의 흑백사진은 자장가처럼 안온하게 들리던 어른들의 떠드는 소리, 아침을 타고 불어온 바람 냄새, 툇마루에 내려앉던 햇살 한 자락까지, 어떤 스냅 사진 못지않게 아련해진 것들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옆집 아이도 건넛집 할머니도 와서 같이 밥을 먹었고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식구처럼 어울렸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할머니의 환갑잔치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긴 일종의 '동네잔치'였던 셈이다.
얼마 전 아이의 초등학교 운동회에 갔었다. 세월이 가면 운동회의 추억은 달리기의 등수가 아니라 봄날, 또는 가을날의 아득한 정취로 남는다. 하늘에 걸린 만국기와 운동장을 메우는 아이들의 함성소리는 여전했지만 더불어 예전엔 없었던 광경도 눈에 와 닿았다. 내 아이만을 따라다니는 부모들의 눈길과 카메라, 함께 있어도 다른 가족들과는 서로 등진 채 앉은 사람들, 집집마다 가져온 깔개들의 끝선은 운동장에 그어놓은 횟가루 선처럼 경계의 의미를 분명히하고 있었다.
격세지감이 절로 들어 잠시 어릴 적 운동회를 돌이켜 보았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즐비한 솥뚜껑 사이로 종일 모락모락 김이 새어나왔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날만큼은 음식을 앞에 두고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운동회는 늘 국민체조로 시작해서 국민체조로 끝을 맺었는데 밭일 나가 있던 농부도 한 번쯤은 다녀가고 어르신에서 꼬마들까지 온 마을 주민들이 구경 나와 즐긴 '동네잔치'였다.
그랬다. 그게 환갑잔치든 운동회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면 동네잔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리 할머니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동네의 할머니였고 옆집 아이의 학교 또한 우리 동네 우리 학교였기에 가능했다. 다가오는 6'2지방선거를 두고 정당과 정치인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잔치라는 말도 있고 20대 젊은 층의 저조한 투표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지방선거야말로 지역민이 다 같이 함께하는 진짜 '우리 동네 우리 잔치'가 되어야 한다. 할머니의 환갑을 다 함께 기뻐하고 옆집 아이의 뜀박질에서 희망을 보았듯, 지역민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우리 지역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역민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 일등만 있는 운동회가 있을 수 없듯이 지방선거의 참된 의미 또한 누가 당선되느냐에 앞서, 함께하는 마음과 투표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선거는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우리의 일이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내일을 우리의 손으로 함께 일구어 가는 일이다. 따라서 지방선거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닌 지역민의 잔치가 되도록 젊은 세대가 더 앞장서 투표해야 한다. '함께 하는 가치'를 모르는 청춘은 아름다울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외면하거나 버리는 일은 스스로를 '우리'로부터 소외시키고 역사에서 비켜 세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 한 장의 투표권에는 자신과 후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함께 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전쟁 같은 봄날을 견뎌내고 유월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와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권은태 (주)마루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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