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학부모회는 돈 없이 안 되나?

입력 2010-05-11 10:53:32

학교 정문에서 수위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색의 묵직한 자가용 한 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 정문 앞에 정지한다. 보석과 명품으로 치장한 만큼 천박해 보이는 몸집이 비대한 중년 여자가 차에서 급히 내린다. 여자는 금테 안경 속에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 두툼한 볼 살을 흔들면서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여자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수업 중인 교사의 뺨을 내리친다. 뺨을 맞은 젊은 여교사는 가냘프게 쓰러진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다. 영화에서 그 여자는 주로 육성회장이거나 그의 아내이고, 육성회장의 아들은 한결같이 교실에서 제대로 적응 못 하는 이상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학부모가 학교의 문화 수준을 넘어서는 세련된 매너와 태도로 잘난 아들, 딸과 함께 치밀하고 집요하게 학교에 압박을 가하는 모양새로 바뀌었지만 인물 설정의 원리는 다를 바 없다. 이번 주말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이런 영화 몇 편이 케이블 방송을 통해 방영되지 싶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자주 나오던 이 육성회의 기억은 과거 우리나라 학부모회의 한 모습이다. 육성회는 1970년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가 시작될 때 학교 교육 환경을 정상화하고 교육 풍토를 쇄신하겠다는 취지로 생겨나 교육 현장에 나름대로 큰 기여도 하였지만 잡부금 부활, 과다한 찬조금, 회비 강제 징수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1995년에 폐지되었다.

육성회는 모든 학부모가 최소한도의 교육비를 분담한다는 원칙하에 소득계층별, 등급별로 회비를 책정하였지만 최저등급의 육성회비도 못 내어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집으로 울면서 쫓겨난 아이, 졸업장을 끝내 받지 못해 학교에 한이 맺힌 아이들이 생겨나게 하였다.

육성회비는 학부모와 임원을 중심으로 징수하여 학생 복지비뿐만 아니라, 교원 연구비와 학교 운영비로도 쓸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회비를 많이 낸 특정 임원이 학교에 대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학교는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돈을 교원 복지와 학교 경비로도 쓸 수 있으니 큰돈을 내는 학부모에게 기대는, 옳지 않은 묵은 관행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육성회는 없어졌다.

육성회 이전에도 학부모회는 있었다. 해방 직후 부족한 교육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재정 후원 조직으로 만든 '후원회'(1946~1952), 한국 전쟁 후 교육 시설을 복구하고 교원 후생을 위해 조직한 '사친회'(1953~1962), 그리고 급격한 교육 인구 증가에 따른 교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한 '기성회'(1963~1970)가 그것이다.

돈이 필요해서 구성한 이 모든 학부모회들은 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결국 하나같이 돈 때문에 폐지되었다. 학부모에게 과중한 물질적 부담 강요, 교사가 직접 금전을 징수하고 교원 후생비 집행, 그리고 끝도 없이 생겨나는 잡부금들과 같은 문제를 드러내면서 사라졌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올해부터 교과부에서는 다른 나라에도 사례가 없지만 학부모회에 지원금을 주면서 활동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회비와 찬조금, 기부금은 일절 거두지 못한다. 지원금을 받지 못하였거나 부족한 학부모회는 단위학교 예산에서 일정 부분을 지원받을 수 있게까지 하였다.

그런데, 회비를 내고 안 내고 간에 돈 문제가 아직도 학부모 정책의 방향 설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자체가 안타깝다. 문제의 근원을 돈으로 보고 정책을 거기에 맞추는 한 문제는 돈에서 생긴다. 지원금은 지원금 여부의 문제를 낳고, 예산 편성은 예산액 과소의 문제를 낳는다.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핀란드 학부모들도 다 회비를 내고 있지만 우리 학부모회와 같은 문제는 없다. 학부모회에 대하여 돈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곧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선거에서도 우리는 후보자의 금품 관련 문제에는 예민하지만 정작 선출할 자치단체장의 역할에는 그만한 관심이 없다. 지자체 선거든 학부모 정책이든 돈 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역할에 대한 얘기일 건데 돈 얘기만 하게 되었다.

이상현 대구시교육청 장학사·학부모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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