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恥百年](18)일제의 관혼상제 말살

입력 2010-05-03 07:52:36

묘지 단속 규칙 만들어 화장 유도…굴건제복도 없애

고종과 순종의 국장은 일본 신사의 신직(神職)이 제관의 우두머리를 맡았고 인산 행렬도 온통 군인 천지였다.
고종과 순종의 국장은 일본 신사의 신직(神職)이 제관의 우두머리를 맡았고 인산 행렬도 온통 군인 천지였다.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경술국치 후 한국의 문화적 전통인 관혼상제를 규제하는 규칙은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단속규칙 24조'가 처음이다. 이 규칙은 조선총독부가 식민 경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임야조사 사업의 하나로 제정됐다. 핵심은 매장보다는 화장을 권하고 매장의 신고제, 개인별 묘지보다는 공동묘지를 이용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두 번째 규칙은 1934년 11월에 발표한 '의례준칙'이다. 당시 우가키(宇垣一成) 담화문은 그럴 듯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는 총독부의 통치로 다양한 발전이 있어 왔으나… 생활양식 중 각종 의례와 같은 것은 구태가 의연하여 오히려 개선할 여지가 적지 않다. 그 중에서 혼장례(婚葬禮) 3가지의 형식 관례와 같은 것은 지나치게 번문욕례(繁文縟禮)하여… 엄숙하여야 할 의례도 종종 형식의 말절에 구니(拘泥)되어 그 정신을 몰각(沒却)하지 아니할까를 우려할 정도에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 이를 혁정개역(革正改易)하지 않으면 민중의 소실을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진흥과 국력의 신장을 저해하는 일이 실로 작지 않을 것이다…."

내용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혼례에서는 약혼식을 중요 절차로 삼고, 장소는 신사나 사원, 교회당으로 확대했다. 제례는 기제사와 묘제를 인정하고 봉사대수는 2대로 단축했다. 상례의 경우 상주, 상복, 상기 등 복잡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새로이 20항목의 상례 절차를 제시, 전통 절차를 완전히 바꿨다. 성복 절차를 생략하고 염습이 끝나면 바로 상복을 입도록 하고 있고 상복은 굴건제복이 아니라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착용하거나 상장을 달도록 제한했다. 더욱이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또 시신을 처리하는 기간으로 정한 상기(喪期)를 5일을 원칙으로 해 14일까지로 단축하고 복을 입는 기간인 복기(服期)는 2개월~2년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혼백이 아니라 지방을 사용하게 하고 상례 절차에서 신주를 만드는 제주에 대한 내용이 없어졌다. 우제 역시 삼우제를 1회의 우제로 단축시켜 버렸다. 결과적으로 혼상제례의 형식적인 절차만 행하도록 규정해 버린 것이다. 절차상의 의미는 사라지면서 의례의 심오한 뜻까지 사라지게 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이미 고종의 국장에 일본식 의례를 주입하려 했다. 전통적인 인산(因山)에 앞서 훈련원에서 봉결식(奉訣式)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식과 서양식이 복합된 영결식을 행했다. 이곳 분향소의 장식과 조화에는 일본 신사의 흰 종이 장식인 가미시데가 등장했고 국장의(國葬儀) 간부 중에는 이토라는 일본 신사의 신직(神職)이 제관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어 일본식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다행히 고종과 순종의 국장에 인산을 인정해 왕릉을 조성하는 일이나 삼년상의 전통은 그나마 훼손되지는 않았지만 군인 천지의 인산 행렬이 되고 말았다.

두 번의 국장은 '의례준칙'의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장이나 유명 인사의 상례 때 엄청난 문상객들이 모여들어 이들이 고종이나 순종의 국장 때처럼 만세 운동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어 시급히 의례를 규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를 넘어 전통적인 관혼상제는 계속 유린당한다. 더욱이 이러한 유린을 광복 공간에서도 여전히 진행하고 있었으니 한 번 밴 습관은 쉽게 버리지 못했다.

1950년에는 '묘지규칙'을 개정해 매장의 신고제를 허가제로 변경하였고 1957년에는 '혼상제의례준칙 제정위원회'를 결성, '의례규범'을 제정했다. 1961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만든 '표준의례'를 보건사회부가 공포했고 1967년에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다. 그리고 1969년 1월 법률 제 2079호로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이 대통령령 제 3740호로 발포됐다. 2개월 후인 1969년 3월 대통령고시 제15호로 '가정의례준칙'이 발포돼 법적 효력을 발생하게 됐다.

이에 따라 현대사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기현상인 개인의 가정의례를 정부에서 간섭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더욱 기막힌 것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가정의례준칙 공포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담화문은 식민지 시대의 담화문을 베낀 듯했다. 문구만 달랐지, 내용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번잡한 옛 의례에 따르는 고루(固陋)와 낭비가 빨리 시정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생활의 역사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수정되어 발전하지 않는 한 우리 생활은 불편과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전통이나 전래의 방법이란 마땅히 보전되고 전승되어야 할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나 그것은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형식적인 절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관혼상제만 하더라도 이를 존중하는 그 정신이 귀중한 것이지, 음복(飮福)이나 다과(茶菓)가 많고 적고 하는 절차나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조국 근대화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생활의 합리화·근대화가 이룩되지 않는 한 이 과업 수행은 어려운 것입니다. 정녕 우리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 아래 일상생활에서조차 남의 이목과 체면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랫동안 허례허식에 얽매어 왔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지만 전통의례는 고루한 것이어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다. 의례의 형식과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조국 근대화사업을 위해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1973년에는 법률을 더욱 강화해 상례의 경우 3일장으로 못박아 3일장의 문화적 전통(?)을 만들어냈다. 1999년 2월에는 '건전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고 8월에는 시행령을 발포해 가정의례준칙은 그 힘을 더해갔다. 1999년 8월 필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기사들을 뒤지고 있었다. 1999년 8월 대통령령으로 기존의 가정의례준칙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건전이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붙인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동시에 발포됐다.

격세지감이다. 일본이 식민통치를 위해 우리의 의례문화 전통을 한낱 껍데기로 만들었던 '의례준칙'의 힘이 아직까지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습관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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