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살육전이 벌어졌던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들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이로 인해 1930년대 중반까지 반전(反戰) 내지 염전(厭戰)이 유럽 각국의 지배적인 사회분위기로 자리 잡게 됐다. 1935년 영국의 '평화투표'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옥스퍼드대 토론클럽 '옥스퍼드 유니온'의 반전 선언은 그런 시대상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평화투표에서 영국인들은 1천100만 표 차, 87%의 압도적 지지로 국제연맹을 통한 집단안보와 국제적 군비 축소에 찬성했다. 독일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한 재군비와 군사행동에 나서는 것을 반대한다는 생각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사변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략 앞에서 국제연맹의 무능력은 이미 드러났고 독일은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옥스퍼드 유니온' 토론회 결과는 한발 더 나갔다. 1차 대전 때 가장 먼저 전선으로 달려갔던 귀족 자제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국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처칠은 이를 두고 "참으로 한심하고 치졸하고 수치스런 고백이며… 불온하고 역겨운 시대의 징후"라고 개탄했다.('모던 타임스Ⅱ' 폴 존슨) 이처럼 가망 없는 평화에 집착한 결과 영국인은 히틀러의 야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을 막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초반 히틀러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그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천안함 침몰 사고는 우리도 1차대전 직후 유럽인들처럼 '전쟁 공포증'의 포로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올해 발발 60년이 되는 한국전쟁은 1차대전이 영국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평화통일'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위가 됐다. 물론 전쟁은 없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문제는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당위가 전쟁은 없을 것이란 맹목적 '평화 착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과연 지금 국민 가운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993년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이 잠깐 체감되는 둣했지만 경제 발전으로 남북 간 국력 차가 벌어지면서 어느덧 전쟁은 먼 나라 얘기가 됐다.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정상회담'과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은 이런 착각에 힘을 더욱 실어줬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주적 개념'마저 삭제해 군이 어떤 적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강남 부자'로 대변되는 우파 기득권 세력은 늘어나는 경제 발전이 가져다준 재산 증식의 단맛에 취해 전쟁을 잊어버렸고, 좌파는 좌파대로 '우리 민족끼리'를 더욱 소리 높여 외치며 60년 전의 참혹했던 기억을 지워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분단된 지 60년이 넘다 보니 군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군만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한순간도 전쟁 가능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1968년 청와대 기습,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제1, 2 연평해전은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전면전은 피하고 싶은 것이 남북 모두의 생각이었던 덕이다. 앞으로도 이런 행운이 계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처참하게 두 동강 난 천안함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다.
1967년 퓰리처상을 받은 듀런트(Will&Ariel Durant) 부부는 '역사의 교훈'이라는 저서에서 "역사가 기록된 3천412년간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 286년에 불과했다"고 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전쟁과 반전쟁'에서 "1945년부터 1990년까지 45년 동안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3주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믿음이 전쟁을 막아주지 않은 것이 인류 역사였다. 적군(赤軍)의 창설자 레온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鄭敬勳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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