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 대명사' 동양척식회사, 빼앗은 토지로 소작농 고혈 빨아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일본 상인이나 사업가 혹은 지주를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일본 자본가들은 앞다퉈 조선으로 진출했다. 조선으로 진출하면 재정과 금융 특혜를 누리면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
일제는 병합 직후부터 무단통치로 조선인을 억누르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철도와 도로망을 확충하고, 금융·통신망을 구축하는 등 일본 자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자본 진출에 적합한 여건이 마련되자 일본 자본은 식민지 초과 이윤을 노리고 대거 조선으로 들어왔다.
일본 자본이 가장 먼저 침략한 분야는 농업. 당시 일본은 급속한 공업화로 주식인 쌀이 부족해 막대한 양의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조선은 기후나 농법, 운송 조건에서 수출용 쌀을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일제는 이 점에 주목해 조선에서 쌀 증산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저곡가 체제에서도 쌀을 수출할 수 있는 지주제를 보호하고 육성했다. 지주들은 쌀값이 낮더라도 소작료를 인상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고이윤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일본 자본은 이러한 호조건을 이용해 병합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거 조선의 곡창지대로 진출해 대규모로 지주제 농장을 건설했다.
농업에 진출한 자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기업은 동양척식회사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면서 왕실 소유지와 중앙 및 지방관청이 소유한 역둔토를 몰수해 동양척식회사에 출자했다. 그 가운데 농지는 무려 6억8천310만㎡(2억700만평)에 달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이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소작시켰고, 막강한 권력을 앞세워 가혹하게 소작료를 수탈했다.
일본의 민간 자본도 철도역과 인접해 있는 평야지대로 진출해 대규모로 지주제 농장을 열었다. 경상북도에 진출한 일본 기업 가운데 동양척식회사 다음 가는 대자본가는 경산에 1천485㎡(450만평) 규모의 대농장을 개설한 조선흥업이었다. 도쿄에 본사를 둔 조선흥업은 경산외에도 목포, 삼랑진, 대전, 황주, 해주 등지에 대규모 농장을 보유, 전체 소유지가 1억7천160만㎡(5천200만평)가 넘었다.
이와 같이 일본 자본이 진출하면서 수익성이 높은 조선의 주요 곡창지대는 대부분 일본 자본의 소유지가 됐다. 일본 자본은 농장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가혹하게 소작농을 착취했다. 조선에 없던 강화된 지대 징수법을 도입, 소작료를 종전보다 1~2할씩 인상했다. 또한 수리시설의 수축이나 신식 농구 사용을 강요하고 그 비용을 소작인에게 전가했다. 결국 한말 때 총 수확의 4할 정도를 부담했던 소작료는 일제 강점 이후 7~8할로 인상됐고, 이로 인해 풍년이 들고 추수기가 되어도 소작료를 내고 나면 농민 수중에 남는 곡식이 거의 없었다. 조선총독부 조사로도 곡식 한 톨 없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춘궁 농가가 전체 농가의 4할을 넘었다.
일본 자본은 상공업에도 적극 진출했다. 우세한 생산력과 조선식산은행의 특혜 금융을 앞세워 단숨에 토착산업을 제압하고 조선의 상공업을 장악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정책 지원을 받으면서 독점적으로 제조업을 설립하고 확장해 갔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기업이 필요로 하는 공산품 원료를 정책적으로 증산하고 공판제도를 통해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다. 또한 자본가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도록 조선을 공장법의 적용지역에서 배제시켜 주었고, 치안유지법 등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일제는 조선에 진출한 자본가들에게 법인세와 소득세에서도 특혜를 제공했다. 이러한 호조건을 이용해 일본 자본가들은 조선에서 거침없이 거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일본 자본가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의 전기왕'이라 불린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였다. 오쿠라는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경부철도회사에 입사했다. 조선의 실정을 파악한 오쿠라는 철도회사를 그만 두고 대구읍성의 동문과 북문 외곽의 땅을 사 들이면서 대구 읍성 허물기에 앞장섰다.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막대한 부동산 차익을 얻은 오쿠라는 이를 제조업과 금융업에 투자, 사업가로 변신했다. 또 오쿠라는 전기업에 투자해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거부가 됐다. 당시 전기업은 경쟁자가 없어 오쿠라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는데 그가 설립한 대흥전기는 대구는 물론 전국 전기의 3분의 2를 공급했다.
오쿠라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현재 동아백화점 주차장 부지와 그 일대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오쿠라의 저택 안에는 ㄱ자형 대형주택 외에도 인공으로 조성한 동산과 큰 숲, 그리고 검도 도장이 있었다. 오쿠라는 신라의 귀중한 유물을 포함해 전국에서 발굴 혹은 도굴된 수천점의 문화재를 무더기로 수집했고, 1천여점이 넘는 진귀한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오쿠라가 해방이 돼 미처 가져가지 못하고 숨긴 문화재만 600점이 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 일본 자본가들에게는 큰 힘 들이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황금의 땅이었다.
일본 자본가들이 성공할수록 조선인의 경제는 더욱 몰락하고 가난해졌다. 일본 농장주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고수익을 올릴수록 조선 농민은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화전민이나 도시를 유랑하는 걸인으로 전락했다.
당시 신문에는 파산한 농민들이 밤을 틈타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거나 일본 고리대금업자가 채무 농가의 부녀자를 인신매매했다는 참담한 기사가 빈번히 실렸다.
공장이 들어선 도시의 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대구 북성로와 같이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번화가에는 잘 정비된 가로를 따라 호사스런 미나카이 백화점과 일본식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고, 밤이면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
그러나 화사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대구천과 신천 지류를 따라 누추한 움막이 즐비했고, 그 움막에는 도시 빈민들이 날품팔이와 구걸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움막에 살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하루 15시간 이상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해야 했고, 그렇게 해서 받는 임금은 일본 노동자 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질병과 영양실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젊은 나이에 꽃다운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 갔다. 일제 강점기때 조선은 가난한 조선 민중들에게는 생존권을 부정당한 생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이윤갑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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