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어느 날 대구의 공장지대 풍경
서동진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27년 6월에 개최한 그의 첫 수채화 개인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해 10월에 열린 자토사(?土社) 2회전에도 참여하여 3점을 출품했는데, 자토사는 한 해 전인 1926년 여름 대구에서 결성된 서양화 그룹이었다. 그 단체는 당시 지역에 거류하던 일본인 화가들을 중심으로 박명조를 비롯한 한국인 화가도 서너 명 포함돼 있었는데 창립전에는 아직 서동진의 이름이 없다. 1924년 작으로 서명돼 있는 한 소녀상이 현재까지 발견된 그의 최초 작품이지만 수준을 보면 1927년까지는 수련기를 보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 무렵 양화를 처음 대하는 관객들은 우선 서화와 비교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 시각상의 차이에 주목했을 것이다. 형체나 색채 묘사에 있어서 모두 현실감의 지각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는 새로운 매체로 인식했을 것이다. 주제가 더 이상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인 풍경을 소재로 한다는 것은 의식과 취향에도 영향을 미칠 커다란 변혁인데 이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의 관례가 아닌 평범한 일상이 그림의 주 소재가 된 것이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와 다른 사실주의를 낳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인상주의는 대기나 빛의 느낌을 특징으로 하는 더욱 생생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새로운 지각 경험을 전달하게 됐는데 바로 우리 양화가 처음 대한 양식이 이것과 유사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도시의 일상과 근교의 전원 풍경을 즐겨 그리면서 철저하게 서구산업사회의 소시민적 정서를 반영하는데, 그런 감성적 측면은 자연 우리 양화에서도 공감되는 특성이다. 이 그림에서도 보듯 자본재의 생산시설인 공장지대의 풍경은 칙칙한 인상의 어두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매력적인 모티프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전선과 전신주에 가려진 복잡한 구조를 전달하면서도 투명 수채화의 가볍고 경쾌한 맛을 잘 살렸다. 공장의 독특한 건물 모습이 주변 환경을 관찰하는 평범한 시선에 포착된 장면이지만 청명하게 갠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이 함께 표현돼 계절과 일기가 같이 느껴진다. 나무와 밭의 엷은 녹색은 봄날 한낮의 시각을 짐작하게 해 준다.
다양한 높이와 크기를 지닌 복잡한 구조물들을 이렇게 정연하게 전개시킨 구성을 보면 어느새 뛰어난 작가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높이를 다 넣지 못해 중간에서 자른 중앙의 굴뚝으로 건물의 인상이 더욱 부각되면서 적당한 거리감으로 시야에 들어오게 한 것 역시 돋보이는 구도 감각이다. 바탕의 스케치가 담채의 투명한 물감 아래 그대로 비쳐 연필의 흑연 자국이 많이 보인다. 아직 색채의 대담한 표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그의 초기작임을 알겠다. 1, 2회 개인전의 목록에 각각 '정미소'와 '농원(農園)과 공장'이란 제목이 보이는데 아마 그 즈음일 듯하다.
한 시대나 개인 작가를 살필 때 초기의 발전단계에 보이는 소박한 태도는 고졸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모든 발전에는 시대적 한계가 있고 각각의 표현들은 역사적 단계 안에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취가 있지만 특히 그림에는 기량의 발달이나 지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만족이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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