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악 위안부 할머니의 유언…1억여원 남겨
'내 작은 정성이 위안부 역사관 건립의 주춧돌이 됐으면….'
올 1월 세상을 떠난 고(故) 김순악 할머니.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삶이 일그러졌다. 채 피기도 전에 짓밟힌 삶은 하소연 할 곳도, 상처는 씻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해방을 맞기 1년 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친구와 공장으로 돈을 벌러 나섰다 브로커에게 속아 만주로 끌려갔다. 만주에 가면 학교도 다닐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꾀임에 빠진 것. 하지만 그곳엔 평생 지울 수 없었던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1년 가까이 일본군의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듬해 해방을 맞아 귀국했지만 고향(경산)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해방은 오히려 할머니의 삶을 더 굴곡지게 했다. 위안부라는 멍에가 할머니의 가슴을 천근같이 짓눌렀다. 차삯조차 없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또다시 브로커에게 속아 갖은 고생을 다했다. 이후 이태원, 군산, 여수, 파주, 서울 등지를 떠돌며 힘들게 살다가 1947년에야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 온 할머니는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딱한 이들을 도울 때면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기 때문.
지인 김모(67)씨는 "할머니는 한평생 원망과 분노를 안고 하루도 마음껏 웃어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사셨지만 늘 어려운 이웃들을 챙기셨다"고 말했다.
경술국치 100년, 해방 65년인 2010년 1월 2일 할머니는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눈을 감으면서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을 잊지 않았다.
평생 모은 돈 1억826만원을 절반으로 나눠 소년소녀가장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위해 써 달라고 유언했다. "나 죽어도 잊으면 안 되는데…, 일본에게 사과도 받지 못했는데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위안부 역사관을 짓는다면 너무 좋아."
할머니의 기부로 대구 학계, 정계, 종교계 등으로 구성된 '인권을 위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추진 중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활동이 탄력을 받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25일 오후 대구시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활동 경과보고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인순 사무국장은 "할머니의 선행이 헛되지 않도록 대구시와 역사관 건립을 협의해 나가는 한편 시민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벌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유산집행대리인 안이정선씨는 "할머니의 기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잊지 않고 치유하기 위한 주춧돌"이라며 "역사관 건립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상처와 기억을 우리 모두의 경험과 역사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명예와 인권을 반드시 찾아드리겠다"고 말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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