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불가능이란 없다

입력 2010-01-27 07:57:20

보릿고개 걱정 시적 "전자사업 해야겠다" 朴대통령 만나 담판

보릿고개를 완전히 넘어서지도 못했던 1968년 2월, 호암은 전자산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은 1982년 5월 삼성전자 구미공장 방문을 위해 헬기를 타고 온 호암의 모습. 호암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구미의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애니콜 신화의 기초를 닦았다. 삼성전자 제공
보릿고개를 완전히 넘어서지도 못했던 1968년 2월, 호암은 전자산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은 1982년 5월 삼성전자 구미공장 방문을 위해 헬기를 타고 온 호암의 모습. 호암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구미의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애니콜 신화의 기초를 닦았다. 삼성전자 제공
1982년 5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을 둘러보는 호암.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교환기 국산화를 통해 우리나라 전화적체 현상을 일시에 해소한 것은 물론 반도체와 통신을 결합해내는 방법으로 세계적인 휴대전화 생산기지로 떠올랐다.
1982년 5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을 둘러보는 호암.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교환기 국산화를 통해 우리나라 전화적체 현상을 일시에 해소한 것은 물론 반도체와 통신을 결합해내는 방법으로 세계적인 휴대전화 생산기지로 떠올랐다.

"우리가 전자산업에 뛰어들어야겠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게 뭐 있나. 그러니 우선은 합작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기술자도 모아야 하니 방법을 찾아봐."

보릿고개를 완전히 넘어서지도 못했던 1968년 2월, 호암은 전자산업에 뛰어들어야겠으니 준비를 하라고 직원들에게 일렀다. '삼성전자 신화'를 일궈낸 대표적 인물인 경북대 사대부고 출신의 윤종용(현 삼성전자 고문)을 비롯해 열정을 가진 젊은 삼성 직원들로 준비팀이 꾸려졌다.

호암의 삼성이 전자산업을 시작한다고 한 것은 당시로서는 '코미디'였다. 당시 국내 전자업계는 1958년에 설립된 금성사와 동양정밀이 주도했고, 대한전선과 동남샤프도 가전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 업체가 만들어낸 것은 라디오·TV·전화교환기 등이었고 대부분 내수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연간 수출액은 4천2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우리나라의 저임금을 활용한 미국계 회사들의 전자부품조립수출이 70%를 차지할 정도로 전자산업의 기반은 허약했다.

"일본은 1950년대에 전자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 불과 10여년 만에 서구와 겨루게 되었다. 기술만 도입하면 삼성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확신한다." 호암은 이렇게 자신했다. 그리고 몇 십년 후 대한민국은 삼성전자를 선두로 내세워 세계 최강의 IT강국으로 올라섰다.

◆대통령과의 담판

호암은 1968년 초 삼성물산에 전자산업을 위한 개발부를 설치하고 전자산업을 서둘러 시작할 것을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삼성은 곧바로 국내외 전자산업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들어갔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조사단을 파견했다. 미국의 제니스, 일본의 마쓰시타·소니·NEC·미쓰비시, 유럽의 그룬디히·텔레푼켄·에릭슨 등 당시 조사단이 접촉한 회사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전자회사들이었다.

호암이 직접 외국의 유명회사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NEC의 고바야시 회장, 산요전기의 이우에 회장 등이 그 대상이었다.

전자산업 준비팀이 꾸려진 지 4개월 만인 1968년 6월 12일, 호암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신사업 시작을 대외적으로 공식화했다.

이 발표가 나온 직후 암초가 나타났다. 국내의 기존 업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면 국내 전자업계가 큰 타격을 받는다"고 기존 업계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에 사업허가 신청서를 냈지만 담당 공무원들은 허가서를 내주지 않았다. 기존 업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암이 공무원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지만 사업허가는 계속해서 늦잡쳐졌다.

호암은 정면 돌파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난 것이다.

"각하, 전자산업은 참으로 장래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이것은 (삼성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호암은 박 대통령에게 오랫동안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래요?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대한 개방 조치를 하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호암의 말을 듣고 수긍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이후인 1969년 1월 13일, 그로부터 수십년 후 세계 최고의 대열에 오르게 되는 '삼성전자공업'이 설립됐다.

삼성전자는 발족 9년 만인 1978년 무렵, 이미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1978년 삼성전자는 흑백TV 200만대를 생산, 일본의 마쓰시타를 앞섰다. 연간 생산으로는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미래를 내다본 판단

'따르릉' 1979년 9월. 당시 체신부는 삼성전자에 전화를 걸었다.

"1978년 2월, 산업은행이 전액출자해 경북 구미에 있는 한국전자통신(KTC)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전화 적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자식 교환기 도입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전자통신 같은 기업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향후 제대로 된 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니 정부가 앞장서기보다는 민영화를 해야겠습니다. 입찰에 참여해 주세요."

삼성전자 말고도 금성통신, 동양정밀, 대한전선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입찰은 이상하게 진행됐다. 그동안의 통신사업 기여도 순서에 따라 의견을 묻고 첫번째 질문을 받은 업체가 "하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그 업체에 낙찰이라는 것이다. 삼성은 제일 마지막 순서에 배정돼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앞의 3개 업체에 순서대로 물었는데 모두 안 사겠대요. 큰 시설을 받아낼 만큼 돈도 없고, 운영할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죠. 앞의 3개 업체가 모두 안 하겠다니 삼성에 결국 차례가 돌아왔는데 삼성은 사겠다고 했죠."(뒷날 삼성전자 회장을 지낸 강진구 당시 삼성전자 사장의 회고)

삼성은 구미의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통신기기 사업을 본격화했다. 삼성은 통신기기 사업을 통해 많은 이익을 냈고 훗날 반도체 사업 추진을 뒷받침했다.

다른 모든 업체들이 '투자가치가 없다'며 유리한 조건에도 기회를 버렸지만 호암의 삼성은 기회를 살려낸 것이다. 그리고 삼성은 구미에서 애니콜 신화를 만들어냈다.

◆일흔세살의 도전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1982년 미국 방문 직후 발언, 호암자전 중에서)

반도체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호암의 고민은 깊었다. 고급 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인력을 키워야 하는 것일까? 공장 설비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 것일까?

호암은 당시, 새삼 자신의 나이를 되돌아봤다. 73세, 고희가 지난 나이다. 반도체는 그런 나이의 호암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호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삼성반도체 기술진은 1983년 11월, 세계에서 3번째로 64KD램을 개발해냈다. 일본이 20년 걸려 해낸 일을 불과 1년 안팎의 기간 안에 해낸 것이다. 삼성은 또 1984년 10월엔 256KD램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냈다.

이후 삼성의 반도체는 IBM PC에 탑재되는 등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했고 오늘날 세계 최고 반도체 생산기업이 됐다. 호암은 "하면 된다"는 것을 우리 산업현장에 일깨워준 것이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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