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경북을 걷다-(2)순흥땅을 걷다

입력 2010-01-05 07:35:34

단종 복위사건·의병 토벌작전때 피바람 현장

▲한스빌 = 송림지 옆 통나무 주택촌
▲한스빌 = 송림지 옆 통나무 주택촌 '한스빌'. 야트막한 산과 소나무 숲만 아니면 영락없이 외국 어느 마을의 풍경이다.
▲성혈사 꽃살문 = 공사 중인 성혈사 나한전은 제 모습을 잃었지만 운좋게 꽃살문은 세심하게 볼 수 있었다.
▲성혈사 꽃살문 = 공사 중인 성혈사 나한전은 제 모습을 잃었지만 운좋게 꽃살문은 세심하게 볼 수 있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펴내며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했다. 아울러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고도 했다. 경북 영주시 순흥땅을 둘러본 뒤 기자는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 양식인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부터 선비 정신의 텃밭인 '선비촌'까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박물관'에 다름없다. 하지만 골골마다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계절 좋을 때 이곳을 찾으면 아름다운 풍광에 눈길 돌리기도 바쁘다. 때문에 겨울에 찾는 산하는 비록 화려한 신록이 없어 아쉽지만 차분히 여유를 갖고 흔적 찾기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순흥 땅을 디뎌보자. 그곳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라도 깊은 사연을 담지 않은 것이 없다. 순흥은 느리게 걸을수록 더욱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땅, 순흥

영주 선비촌에서 첫 발을 내딛는다. 송림지(죽계호 또는 순흥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얕은 개울을 이뤄 선비촌과 소수서원 사이를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제월교, 일명 청다리이다.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길 안내를 맡은 소수서원 학예연구원 박석홍씨는 순흥 땅에 서린 피와 눈물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한때 순흥은 '남순북송'(南順北松), 즉 남쪽에 순흥, 북쪽에 송도라고 불릴 만큼 번창했던 곳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참나무 숯불에 쌀밥을 해먹고, 사방 수십리를 다녀도 비를 안 맞을 정도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했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에 소개된 '순흥땅 만석꾼 황부자'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 옛날 순흥도호부로 번성했던 이곳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던 중 밀고로 발각되는 바람에 피바람을 맞게 된다. 수백명의 선비와 가족들이 몰살당했고, '도호부'라는 이름을 잃고 사방으로 땅덩어리가 나뉜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희생자 중 어렵사리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한양에 데려가 키우게 되는데, 생부모도 모른 채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내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는 것. 흔히 장난처럼 던지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순흥땅은 227년 만인 숙종 때 다시 '도호부'로 명예회복되지만 1907년 의병 토벌작전에서 다시 한번 아픔을 겪게 된다. 당시 소백산 자락에는 의병장 신돌석과 이강년이 의병 500여명과 함께 은거하고 있었다.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제는 특수부대 1천700여명을 동원해 토벌에 나섰고, 이때 인근 관아와 민가 180여채가 불에 타 버렸다. 이름과 달리 순흥땅의 역사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삼괴정에서 죽계구곡까지

순흥면소재지에서 죽계구곡쪽으로 길을 돌린다. 1km 남짓 올라가면 오른편에 송림지가 펼쳐진다. 겨울 철새들이 떼를 지어 노니는 모습이 장관이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이국적 풍광이 눈길을 끈다. 10년 전쯤 조성된 '한스빌'이다. 한 업체가 친환경을 표방하며 건립한 목조 주택단지. 박석홍씨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마디 건넨다.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 못내 궁금해진다.

길을 따라 잠시 오르다 보면 거대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나이가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세 그루의 이름을 따 '삼괴정'(三槐亭)이 있다. 그 옛날 마을에서 삼 정승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 아래 '배순정려각'이 있다. 배순은 대장장이 신분이지만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르며 제자의 예를 다했다. 마을 이름인 배점리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이곳을 지나 작은 삼거리에서 왼편이 죽계구곡 방향이다. 행락철이면 제법 북적이는 탓에 차를 타고 이 길을 오르기가 어렵다. 중간쯤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초암사와 멀리는 국망봉까지 올라야 한다.

요즘처럼 비수기에는 계곡을 따라 차를 타고 한참을 오를 수 있다. 초암사까지는 3km 남짓한 거리. 걸어서 1시간은 족히 잡아야 한다. 길은 몇 차례 갈지자로 꺾어 죽계구곡을 넘나들며 북서쪽으로 향한다. 수목이 우거지면 계곡으로 내려서기도 쉽잖겠지만 겨울에는 온산이 속살을 다 드러낸다. 여름이면 물소리가 장쾌하게 들릴 터. 하지만 지금은 물소리도 얼어붙어 계곡은 고요하다. 낙엽이 켜켜이 쌓인 숲을 헤치고 계곡으로 내려서면 겨울 비경이 볼 만하다. 원래 조선 영조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초암사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1곡부터 9곡까지 명명했으나 명종 때 퇴계 선생은 아래서 위로 하나씩 굽이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현재는 아홉굽이 중 1·2·4·5·9곡만 이름이 전한다. 팻말을 따라 굽이마다 찾아보는 것도 재미다. 바위에 새겨진 계곡 이름은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많이 흐려졌다. 지금은 콘크리트 포장길이 돼 버려 옛 정취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간간이 옛길 흔적이 남아있다. 그 옛날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올려 쌓았다는 돌다리는 이제 바위 구멍만 남아 세월의 더께를 실감케 한다.

◆소담함을 잃어버린 절집의 정취

찬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히며 도착한 곳은 초암사.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기 위해 명당자리를 고를 때 임시 초막을 지은 곳이 바로 초암사 터다. 산 그림자 아래 가리운 초암사는 겨우내 찾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을씨년스럽다. 절집 마당에 석탑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그리 웅장하거나 빼어나게 예쁜 탑은 아니지만 한때 피로 물들었던 순흥땅을 담담하게 바라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다행스레 콘크리트 길은 여기서 끝난다.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국망봉과 비로봉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석륜암 계곡에 이른다. 여기서 발원한 물은 황지에서 흘러든 물과 저 아래에서 만나 낙동강을 이룰 터. 초암사에서 국망봉까지는 5km 거리. 이곳부터는 산행길이다. 국망봉을 올라 능선을 타고 비로봉을 디딘 뒤 비로사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산행 채비를 못했다면 이쯤에서 내려와야 한다.

발길을 돌린다고 허전할 것은 없다. 죽계구곡을 되짚어 내려간 뒤 다시 배점마을에서 오른편으로 길을 잡으면 덕현리 성혈사에 이를 수 있다. 덕현리로 이르는 길은 도로 확장이 한창이다. 가뜩이나 곳곳에서 콘크리트 길을 닦는 통에 호젓한 맛이 사라졌는데 이제는 대형버스가 오가는 길로 넓힐 작정인가보다. 덕현리로 가던 중 왼쪽으로 꺾으면 성혈사 길이 나온다. 제법 가파르다. 구비진 길은 1km가 넘고 경사가 제법 있다 보니 걷기에 빡빡하다. 하지만 성혈사에 가면 보물 제832호로 지정된 나한전이 있다. 아담한 맞배지붕에 배흘림기둥과 문창살이 아름다운 전각이라고 한다.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올라 들어선 절 마당은 산 아래를 한눈에 굽어본다. 그런데 아뿔싸! 기대했던 나한전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고졸한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고 공사를 위해 쳐놓은 천막과 기둥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그나마 다행은 꽃살문(통판투조 연지수금꽃살문)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나한전 꽃살문은 연못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 채운 뒤 곳곳에 물새, 개구리, 물고기, 자라, 게를 새겨놓았다. 연잎 위에서 노를 젓는 동자상은 귀엽기 그지없다. 색은 모두 바래서 그 옛날 화려한 맛은 없겠지만 오히려 나무 결이 그대로 살아난 꽃살문은 자체로서 예술 작품이다. 성혈사 전망을 뒤로 하고 다시 덕현리로 내려오면 발 아래 거대한 과수원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굽잇길이 눈에 든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밖에 없지만 사과꽃이 만발할 때, 잎사귀가 무성할 때, 붉은 사과가 가지마다 가득 찰 때 그 길을 걷노라면 그 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소수서원 학예연구원 박석홍 054)634-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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