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지역적 시련 딛고 '순수 문예지' 명맥 유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자 가장 먼저 그 기능을 되찾은 것이 말과 글이었다. 모국어를 되찾음으로 해서 해방된 문단은 좌우익이 대립하는 혼란 속에서도 신문'잡지'작품집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향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5월에 시 동인지 '죽순'이 이윤수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 모체인 '죽순시인구락부'가 발족된 것은 잡지가 발간되기 6개월 전이었다. 서문로 동산파출소 옆에 있던 명금당(名金堂'지금의 서문로교회 교육관 자리) 시계포 기둥에 '죽순' 간판이 걸렸다.
1946년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특히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이념투쟁이 격렬했었다. 마침내 '10'1 사건'이 벌어졌다. 남로당 외곽단체인 대구노평(大邱勞評)의 조종에 의해 수많은 군중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파출소를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약 3개월 동안 소요가 이어진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로 해서 문총(文總) 지부의 결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죽순'이 창간되었으니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산업시설이 생산을 중단한 상태여서 책을 인쇄할 종이를 구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종이를 구해 인쇄에 들어가면,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 석유 램프를 밝히고 발로 인쇄기를 돌려가면서 작업을 하였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윤수는 불굴의 저력과 끈기로 원고 청탁'편집'교정은 물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발송까지 도맡아 했었다. 그로 인해 생업인 가게를 꾸려나가는 일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창간호에는 이윤수를 비롯해 유치환·오란숙·박목월·이호우·김동사 같은 17명의 동인들이 시를 발표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호를 거듭하자 작품을 발표하는 동인이 전국 규모로 늘어나 60여명의 시인들이 235편의 작품을 발표했었다. 그 가운데는 김달진·박두진·조지훈·김상옥·윤곤강·이상로·조연현·구상·조영암·서정태·설창수·이경순·조향·김춘수·이정호·신동집·박화목 같은 작가와 추천을 통해 김요섭·윤운강·최계락·천상병·이명자 같은 신인들이 문단에 나왔다. 그리하여 '죽순'은 해방된 문단의 시 전문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죽순'이 담당한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금당'은 오갈 데 없는 허전한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다. 외지의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대구에 오면 으레 명금당을 찾았고, 주인이 끓여내는 커피를 마시거나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도 했었다. 자그만 가게 안은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었고, 시를 쓰는 이정호는 이 같은 분위기를 두고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파리의 카페' 같다며 탄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서문로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또 있다. 1947년 9월의 어느 날, 김소운이 가을비를 맞으면서 명금당을 찾아온 것이다. 죽순 동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술자리가 벌어지자 뜻밖의 제안을 했다. 대구 출신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뜻이 모아졌고, 곧바로 부서를 정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다소의 갈등이 없지 않았으나 이듬해 달성공원에 시비를 세우게 되었고, 시비에 써넣은 '나의 침실로'의 한 구절은 당시 열한 살이던 상화의 셋째아들 태희가 썼다.
죽순문학회가 걸어온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중간에 휴간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그와 함께 지방에 있는 문학단체라는 이유로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그동안 창간호부터 제10집까지를 묶어서 '죽순 영인본'을 발간하였고 지금껏 '죽순 43집'을 펴냈으며, '상화 시인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모임을 이끌어 온 시인 이윤수, 소설가 윤장근 같은 원로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와 함께 시류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 문예지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려는 회원들의 열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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