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여행] 고소하다, 겨울바다의 맛…동남해변 맛기행

입력 2009-12-05 07:05:46

기장 짚불곰장어는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고안된 조리실에서 활활 타오르는 볏짚 불로 익힌다.
"소주에 딱이죠" 꿈틀꿈틀∼ 짚불곰장어
대변항 부둣가 상인이 건조용 냉동 멸치를 손질하고 있다.
기장 짚불곰장어는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고안된 조리실에서 활활 타오르는 볏짚 불로 익힌다.
날것으로 먹는 고래 순살코기
대변항 부둣가 상인이 건조용 냉동 멸치를 손질하고 있다.
날것으로 먹는 고래 순살코기 '막찍기'.

이즈음에 먹는 것, 특히 '맛'을 이야기하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먹을거리가 없어 개떡을 먹었다는 세대가 아직 정정하고, 달성공원 무료급식소에는 끼니를 기다리는 행렬이 긴데…. 이럴 때 먹는 것, '맛'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심히 무안한 일이다.

그러나 혀가 기억하는 것들은 지독히 장구하고 끈질겨 그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먹은 한그릇의 자장면, 그 춘장의 냄새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식탐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종일 노동에 지친 몸이 '숯불에 노릇노릇 익힌 고기 한점' 생각하는 것은 책망할 것만도 못 된다.

겨울 벌판 회오리바람은 볏짚 지푸라기들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는데, 몸은 그 지푸라기들에 잇대어 짚불곰장어를 생각해내고 만다. 아마도 이 계절 부산 기장으로 가면 짚불곰장어가 잘 익어가고, 멸치젓도 충분히 곰삭았을 것이다. 요즘에는 고래고기 마니아도 많이 늘었다니 겨울에도 반도의 동남쪽 바닷가는 풍성할 것이다.

◆기장 짚불곰장어

곰장어는 먹장어의 다른 이름으로, '아나고'로 불리는 붕장어보다 길이가 짧고 굵기도 가늘다. 곰장어는 겨울철 것이 체내지방이 적어 맛이 뛰어나다는 것. 지금이 제철이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달맞이고개를 넘어 기장읍에 다다르면 '짚불곰장어'라고 적은 간판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인다. 짚불곰장어는 기장의 향토음식 중 하나이다.

기장곰장어는 지방 사람들이 볏짚에 불을 지펴 산곰장어를 던져 넣어 익힌 다음 껍질을 벗기고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아마도 쇠죽솥 앞에 앉아 쇠죽 끓이면서 몇마리 구워 한잔 소주 안주 삼았다면 딱 제 맛이었을 터.

지금은 곰장어를 불에 던져 넣지 않고 철망소쿠리에 담아 익힌다. 그렇게 5분 정도 꽃불에 올려진 곰장어는 그을음과 짚재가 묻어 시꺼멓다. 껍질은 장갑 낀 손으로, 마주 잡고 훑으면 쉽게 훌렁훌렁 벗겨진다. 약간 노릿하게 익은 속살은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 준다. 과거에는 익힌 곰장어를 옹기뚜껑에 담아 와서 손님 앞에서 직접 손질해줬다. 요즘은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하자 주방에서 손질해 내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익은 곰장어는 기름소금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면서도 단맛이 배어난다. 맛은 담백하고 씹히는 육질도 연해 목넘김이 부드럽다. 껍질을 벗길 때 내장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약간 쌉쌀한 뒷맛 때문에 다소 거북스러운데, 내장을 완전히 빼내면 한결 많이 먹힌다.

짚불곰장어 궁합 1순위는 물론 소주이지만 야채류와 잘 어울린다. 보통은 상추에 풋고추와 생마늘을 얹어 먹지만, 넓적한 기장 미역에 싸서 먹어도 별미다. 물론 기름장에 찍어 먹기보다 된장에, 상추나 깻잎에 쌈 싸서 먹기보다 '누드'를 즐긴다면 짚불곰장어깨나 먹어본 '고수'소리를 들을 만하다.

다른 곰장어 요리로는 양념구이와 매운탕도 있다. 4인 가족이 곰장어 집을 찾는다면 짚불곰장어 2인분, 양념곰장어 2인분을 주문하면 좋을 듯. 짚불곰장어로 소주 한잔 하고 양념곰장어에 밥을 비벼 먹으면 한끼 너끈하다. 짚불곰장어 2인분 4만원.

◆대변항 멸치회

기장군 대변항에는 봄철 사월초파일 전후로 멸치축제가 열린다. 겨울철 대변항은 봄철처럼 붐비지 않는다. 싱싱한 멸치회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날이 거칠어 멸치배들은 부두에 결박되어 있고 선원들은 모두 대폿집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멸치회를 먹고 못 먹고는 그날 하루 재수. 그래도 일단 대변항을 들러볼 일이다.

겨울철 항구라고 한적하지만은 않다. 김장철을 맞아 멸치 젓갈을 사려는 사람들로 길은 주차장을 이룬다. 부둣가 도로 옆에는 멸치젓을 담은 플라스틱 통이 산더미를 이뤘다. 어떤 집은 아예 독째로 가게에 들고 나왔다. 부두는 멸치 젓갈 내음이 흥건하고, 호객꾼 소리가 갈매기 짖는 듯하다.

멸치회는 흔치 않지만 맛볼 수는 있다. 횟감은 활어가 아닌 급속 냉동한 것. 멸치배를 타는 동남아나 중국 등 해외근로자들이 술값이나 마련하려고 하선할 때 조금씩 들고 나온 것이다. 급속 냉동한 멸치회는 봄철의 살아서 퍼덕거리는 회 맛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갖은 양념과 야채를 넣어 버무린 회는 아쉬운 대로 안줏감이 될 정도이다.

본디 대변항 멸치회는 남해 멸치회와는 사뭇 다르다. 남해 쪽 멸치회는 싱싱한 잔멸치를 내장만 따내고 야채와 양념에 버무려 내놓는다. 그러나 대변항을 비롯한 동해안은 멸치가 크기 때문에 무침회를 하지 않고 생짜로 내놓는 게 원칙이다. 노가리 크기 버금가는 대변항 멸치는, 한 손으로 꼬리를 잡고 엄지와 집게손톱으로 훑어내리면 큰 뼈만 남고 육질은 포 뜨듯 그대로 발라진다. 이렇게 장만한 것을 초고추장에 찍어 한입에 먹는 것이 멸치회의 오리지널이다.

겨울철 대변항을 찾는 사람들은 차라리 멸치찌개에 관심을 갖는다. 멸치찌개는 냄비 바닥에 시래기를 깔고 횟감으로 쓰는 멸치를 넉넉히 넣는다. 무, 파, 청양고추 따위를 더해 양념을 하고 불에 올린다. 멸치 뼈는 씹어먹기도 발라내기도 좀 애매한 편이지만 살코기는 제법 씹히는 식감이 있다. 겨울철 밥반찬으로 훌륭하다.

제철이건 아니건 대변항 멸치 회나 찌개가 매력적인 것은 싼 맛 때문. 멸치찌개 한 냄비 1만~2만원. 회 한 접시 1만원부터. 4인 기준으로 2만~3만원이면 점심 한끼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장생포 고래고기

고래는 바다생물이기 이전에 전설이다. 대왕고래 한 마리는 보통 180t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70㎏ 성인 2천570명의 무게와 같다. 이렇게 거대한 생물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왠지 불경스러워 보인다. 더구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의 고래 포획이 금지된 후 더욱 께름칙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고래고기를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고래고기 12가지 맛', 그 맛에 홀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고래고기라면 고개를 내젓는다. 고래고기를 좀 먹었다는 사람들도 '기름기 때문에 속이 탈났다'거나 '몇점 먹고 나니 먹히지 않더라'는 둥 둘러댄다. 또 포항 죽도시장이나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번들번들한 거대한 고깃덩이를 본 사람이라면 응당 이맛살을 찌푸린다.

고래고기의 맛은 과연 거기까지일까? 고래의 고장이라는 울산 장생포도 그럴는지….

장생포에는 고래고기만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 6곳 있고, 메뉴에 올려놓은 식당이 20여곳 있다. 고래고기 가운데서는 밍크고래를 최고급으로 친다. 대도시 식당에서 맛보기로 내놓는 고래고기는 십중팔구 돌고래이기 때문에 '제맛(?)'이 아니다. 장생포에서는 대부분 밍크고래를 날것과 수육, 그리고 탕으로 손님 식탁에 내놓는다.

날것은 '막찍기'라고 해서 순살코기 부분을 저온숙성시킨 다음 납작하게 썰어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는다. 이때 포인트는 숙성 정도. 잘 숙성된 것은 약간의 고래고기 향미가 있으며 입안에서 저절로 녹듯 부드럽다. 날것 가운데는 '우네'라는 메뉴가 있는데, 이는 '밭이랑'이란 일본말로 배 부위의 밭이랑처럼 주름진 살을 말한다. 우네는 급랭시켰다가 얇게 썰어 고추장이나 고추냉이에 찍어 먹는다. 이것은 급랭이 풀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껍질 부분이 다소 질겨진다. 날것으로는 육회로도 먹는데 쇠고기 육회와 마찬가지로 배와 참기름 등의 양념을 넣어 무친다.

수육은 뭍의 것과 마찬가지로 내장, 껍질, 갈빗살 등을 삶아 부위별로 내놓는다. 주로 멸치젓국에 찍어 먹는데 부위별로 맛이 제각각이다. 수육 가운데 특이한 것은 '오배기'로 고래 꼬리부분을 소금에 6개월 이상 절인 뒤 얇게 썰어 데친 것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고래고기를 옳게 하는 집일수록 수육의 종류가 다양하며 오배기를 맛나게 요리한다.

밥반찬이나 술국으로 고래고기 탕이나 찌개를 하기도 하는데 맛은 소고기 요리 맛과 흡사하다. 최근에는 찜, 스테이크, 카레요리로도 개발되고 있다.

고래는 부위별 고기를 양념장에 궁합 맞춰 찍어 먹어야 비로소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이렇듯 갖춰진 고래고기에 맛들인 사람들은 특유의 매콤한 맛과 '싸~아'한 향을 좀체 잊지 못한다.

장생포 고래고기는 귀한 만큼 다소 비싸다. 수육 한 접시 7만원부터, 막찍기 3만원부터.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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