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잡고 싶었던 학창시절… '내 친구' 모습이기에 더욱 익숙하다
분명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전설적인 학원물과는 다른 영화다. 이번 주 개봉한 '닌자 어쌔신'이나 '홍길동의 후예'처럼 굵직한 작품들을 제치고 굳이 '바람'을 택한 이유? 주인공의 평범한 외모가 좋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 가령 어느 학교 '짱'이 다른 학교 '짱'과 일대일로 붙었는데 무술 영화가 따로 없었다거나 거칠기 이를 데 없는 한 선배가 교무실을 한바탕 휘젓고 난 뒤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가방을 둘러메고 교문을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런 반항을 한번쯤 꿈꾸기는 했지만 실제 그렇게 한 친구들은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그저 '~카더라' 정도로 끝나버려서 몇 번만 구체적으로 캐묻고 나면 유리어항처럼 바닥이 뻔히 보이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같은 캐릭터나 '친구'의 유호성 또는 장동건 같은 캐릭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폼 잡고 싶던 열여덟살, 내 모습과 내 친구들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 게다가 등장 배우들의 연기는 얼마나 실감나던지. 놓치기 아까운 영화다.
◆폼 잡고 싶었던 우리의 짱구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정국(정우)은 이름보다 '짱구'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집에서도 그렇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공부에다 운동까지 잘하는 친형과 같이 중학교를 다닌 덕분에 선배들의 괴롭힘은 전혀 모르고 자랐다. 동네에서 좀 논다는 형이나 친구들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다. 하지만 똑똑한 형과는 달리 일찌감치 공부와는 높다란 담을 쌓았던 짱구는 상업고에 진학한다. 형 덕분에 편한 중학 시절을 보냈지만 상고는 다르다. 약육강식이 살아숨쉬는 정글에 홀로 내던져진 꼴이랄까. 게다가 입학 첫날 밥상머리에서 형은 눈초리를 치켜뜬 채 한마디 던진다. "니, 사고 치마 알재?"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딸꾹질이 날 정도로 소심하다.
자상한 누나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엄마, 그리고 엄하기 그지없는 아버지가 있다. 사고 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가정환경이 되겠다. 새 학년을 맞고 일주일 정도면 반에서 세력 구도가 대충 잡히기 마련. 나름대로 한 눈빛 하는 친구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적당히 견제도 하고, 슬쩍 건드려보면서 만만한 상대인지 탐색전도 벌인다. 나름대로 기죽기 싫었던 우리의 짱구. 하지만 입학식 때 학교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불법 서클 3대파의 간택을 받지 못하면서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고 제 발로 폭력서클에 걸어 들어가기에는 너무 소심하다. 폭력서클에 이름을 올리면 학교 선도부도 건드리지 못하고, 교무실 학생부장에게도 통보된다. 큰 사고만 안 치면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인정해 주는 셈이다.
◆폼만 잡았을 뿐 주먹질은 없었다
다행히 중학교 시절 알고 지냈던 선배들 덕분에 짱구는 학교에서 한 주먹 쓰는 친구로 통한다. 사실 주먹을 쓴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저 사전에 기선제압하고, 같이 어울려 지내던 선배나 친구들 때문에 일진으로 통하는 정도랄까.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일찍 하교했다가 이튿날 밀대 자루가 다 부러질 때까지 맞는 일이 생긴다. 앞서 맞은 친구들처럼 5대를 맞는 동안 꼼짝도 않고 꿋꿋하게 맞아주리라 결심했건만 2대를 맞고는 그만 풀썩 주저않아서 "새앰, 잘못 했심더"를 연방 읊어대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어찌됐건 학교에 반항적인 이미지를 잔뜩 풍겼던 덕분에 교내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불법서클 '몬스터'에 영입되고, 우리의 짱구는 폼나는 고교생으로 살아갈 일만 남았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짱구가 이래저래 사건에 휘말리면서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지게 되고, 그런 와중에 여자친구 주희(황정음)를 만나는 이야기도 나온다. 짱구와 주희의 만남은 아지트처럼 지내던 한 커피숍에서 이뤄진다.
사실 주희와의 만남은 로맨스라기보다는 짱구가 고교생활을 하며 만난 '가장 스케일이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계기 정도에 불과하다. 가슴 설레는 첫 만남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풋풋한 첫사랑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아무튼 주희가 앞서 사귀었던 남자와 시비가 붙은 짱구. 그 녀석은 비겁하게도 거의 조폭으로 보이는 친구 18명이나 끌고 나타나서 짱구의 눈탱이를 쥐어박았다. 다행히 가슴팍을 도화지처럼 쓰는 커피숍 옆집 화장품가게 아저씨가 등장하는 바람에 당구장까지 끌려가는 사태는 막았지만. 이튿날 주희와 함께 3자 대면을 통해 누가 진짜 남자친구인가를 가리기로 하고 헤어진 뒤 커피숍에서 나오는데 마침 학교 불법 서클인 '몬스터'의 선배를 만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고픈 그 간절한 바람
부산 서면시장 일대는 삽시간에 긴장감으로 넘쳐난다. 짱구가 다니는 광춘상고 일진 서클인 '몬스터'파 80여명이 거리를 차지하고, 우리의 짱구를 건드린 18명과 결전을 앞두게 된다. 영화 '바람'의 매력은 여기서 나온다. 잔뜩 폼만 잡았지 때리고 부수는 폭력 장면은 없다. 실제 우리 고교생활이 그러했듯이. 늘 실제는 소문으로 부풀려지게 마련 아닌가. 아무튼 인근에서 '짱'으로 통하는 학교 선배가 나타나 말 한마디로 18명이 뒤꽁무니를 빼게 만든다. 영화 속 결정적인 장면마다 등장하는 '비장한'(?) 국악은 마치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웠던 세상이, 혹은 긴장감에 빠져죽을 것 같던 아찔한 순간들이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다고 놀리는 것 같다.
영화 후반부는 짱구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간경화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 그는 짱구의 아버지이자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렸고, 저녁시간이면 행여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들고 오시지 않을까 기다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속 깊은 이야기도 못해보고 그저 어려워만 했던 우리 아버지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뒤 뒤늦게 철이 든 우리의 짱구. 장례식장에서 혼자 울다 잠들었다가 비몽사몽간에 만난 '아빠'를 보며 엉엉 우는 그 장면은 거칠고 반항적이기 짝이 없지만 아직은 어린애에 불과한 사춘기 남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빼어난 장면이다. 영화 제목 '바람'(Wish)은 간절히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성한 감독의 빠른 스토리 진행과 사건 해석에 대한 독특한 견지, 그리고 배우 정우를 비롯해 아직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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