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할 수 없는 세상…" 좌절과 분노 힙합으로 분출
노래를 듣다가 목이 울컥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 편이다.
얼마 전, 낙엽이 길거리를 스산하게 쓸고 다니던 날도 그랬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래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처음에 둘은 모든 것이 너무나 잘 맞았다. 결코 이 이상의 여자는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좋은 것은 당연해졌고, 모든 것이 변해갔다. 남자라는 이유로 호통치고 야단쳐, 싸우면 끝엔 꼭 이겨, 길들인답시고 막 울리고, 울면 다냐고 또 울리고, 한번 대들면 열 마디, 째려보면 백 마디, 못된 말들로 억지로 이기고, 또 이기고. 그러던 어느 날 하늘하늘 하던 그녀는 떠나 다시 오지 않고, '세상에 너밖에 없어?'라며 혼자 센 척 하다가 샤워하면 금방이라도 빨리 씻고 나오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할까봐 습관처럼 물 묻은 손으로 전화기를 확인하고, 끝났음을 실감하고 물줄기 속으로 숨으러 들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샤워기 아래서 눈물을 숨기며 울고 있는 한 남자의 슬픔과 후회가 가을 낙엽처럼 쓸쓸하게 전해졌다.
이 노래는 가수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싸이가 리메이크한 곡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고엽'(Autumn Leaves)도 아니고, 싸이의 랩을 들으면서 마음이 처연해지는 것 또한 희한한 일이었다. 랩이란 장르가 젊은 청춘들의 활화산같은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랩을 소재로 한 영화 '8마일'(2002년)도 놓을 수 없는 꿈과 가혹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이겨낸 스물 남짓 래퍼의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하는 영화다.
'로즈 유어셀프(Lose Yourself)'의 랩가수 에미넴이 주연을 맡고, 'LA 컨피덴셜'의 커티스 핸슨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은 "'록키'를 보기 위해 모두 권투선수가 될 필요가 없듯이, '8마일'을 보기 위해 모두 힙합 팬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랩에 대한 기성세대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친절한(?) 배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배려가 필요 없이 관객을 자연스럽게 랩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어느새 음악에 맞춰 머리가 끄덕이는 자신을 보게 된다.
'버니 래빗'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미 스미스 주니어(에미넴)는 디트로이트 빈민 지역 8마일가에서 어머니(킴 베이싱어)와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틈틈이 랩을 노트한다. 임신한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만난 모델 지망생 알렉스(브리트니 머피). 그러나 지미의 재능을 시기하는 흑인 래퍼 집단 프리월드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유일한 안식처인 트레일러에서도 쫓겨날 신세가 된다.
친구들의 권유로 '랩 배틀'에 출전한다. 45초 동안 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경기다. '백인 쓰레기'라는 야유에도 그는 가슴 속 가득한 분노를 랩으로 분출한다.
'8마일'은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촬영됐다. 디트로이트는 번창했던 시절의 꿈과 희망을 잃은 지 오래다. 실업과 빈곤, 폐허와 뒷골목이 디트로이트의 이면. 중산층은 사라지고 부유층과 빈민층이 뚜렷하게 나눠진 도시다.
'8마일'은 바로 그 경계인 '8마일 로드'를 뜻한다. 빈부의 경계지만, 그 길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지미나, 뉴욕으로 가려는 알렉스는 그 벽을 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혼이다.
커티스 핸슨은 그 몸부림을 냉혹하거나, 반항적이고, 전투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지미의 동생 릴리(백합이란 뜻)에서 보듯, 희망과 꿈을 가진 이들이 이겨내야 하는 시련으로 그려낸다. 랩은 그들의 현실을 위로하는 유일한 소통점이다.
이 영화는 본명이 마샬 매터스인 에미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1999년 '슬림 세이디 LP(The Slim Shady LP)'로부터 2002년 앨범 '에미넴 쇼(The Eminem Show)'까지 약 3천만 장에 달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래퍼다. 힙합이 격렬하고 신랄한 음악으로만 간주되던 90년대 중반, 가난한 흑인 동네에 백인으로 살면서 좌절과 분노를 힙합으로 분출하던 그의 젊은 시절을 재현하고 있다.
랩 세계에서 에미넴의 존재는 대단하다. 그동안 랩은 주류인 백인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흑인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고정관념이 바뀌게 되었다.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에미넴이 실제로 자란 디트로이트에서 촬영되었으며, 촬영에 에미넴의 친구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가수인 에미넴의 연기가 뛰어나다. LA 타임스의 평론가 케네스 튜란은 "에미넴은 업데이트된 제임스 딘의 특질을 지녔다"고 치켜세웠을 정도다. 분노와 고통을 조용히 감내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젊은 영혼이 대견하면서도 가슴 찡하다.
특히 랩 배틀에서 이긴 후에도 야근을 위해 공장으로 가는 장면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다. 뒷골목에 길게 이어진 지미의 그림자는 멀고 먼 현실의 벽을 잘 그려내 주고 있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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