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철수야, 놀자!"

입력 2009-11-06 10:42:40

해질 녘 주택가 골목은 적막하다. 가끔 비좁은 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과일행상이 틀어 놓은 녹음기 소리 만이 고요를 깨뜨릴 뿐이다. 왜 이렇게 을씨년스러울까 생각하다가 곧 골목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요새는 어딜 가나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놀이터도 한산하긴 매한가지다. 그러면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이 시간, 거의 학원에 가 있거나 학교에서 과외 공부를 한다.

적막한 골목을 쓸쓸히 바라보다가 문득 얼마전 우연히 읽은 신문 기사를 떠올린다. 사연인즉 어느 아파트단지에 부모들이 만든 별난 동아리가 있어 화제라는 것이었다. 못 노는 아이들을 위해 그 동아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한바탕 신나는 놀이판을 벌인다는 것이 줄거리였다. 물론 기사는 '주위의 곱지 않은 눈길도 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 눈길이란 물론 이런 것일 테다. "아이들을 저렇게 놀려도 되나?" "세상에, 얼마나 아이들이 놀지 못하면 그런 동아리까지 생겼을까. 또 그런 것이 신문에 다 날까."

잠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삼사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가 파할 무렵이 되면 날마다 골목은 아이들로 가득 찼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어도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잘도 놀았다.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집집에서 어른들이 나타나 아이를 데려갈 때까지 놀이판은 깨어지는 법이 없었다. "철수야, 놀자!"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동무의 외침소리에 숙제하다 말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던 경험쯤, 그 시절을 겪은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노는 것'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나를 포함한 이 나라 어른들은 대개 '일하는 것'이란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놀이는 일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저 뜻 다른 말이다. 놀이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잘 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일을 놀이처럼 신명나게 함으로써 고단함을 잊고 능률을 높이지 않았던가. 일과 놀이가 하나 된다는 것은 사실 가장 바람직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노는 것처럼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 있는 공부 방식이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났더니 자신도 모르게 뭔가 배우고 익히게 되더라는 것, 이보다 더 훌륭한 공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요즈음 우리 아이들은 이 대수롭잖은 경험조차 누리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공부는 곧 무거운 짐이요 괴로운 노동이요 답답한 굴레일 뿐이다. 도무지 즐거움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라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 녀석들 공부 안 하고 뭘 하는 거지?" 하지만 곤충을 관찰하는 것은 무척이나 훌륭한 공부이다.

아이들이 놀이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자연 속에서 하는 놀이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준다. 여럿이 하는 놀이는 공동체 안에서 절제와 배려의 값어치가 얼마나 큰지를 깨우치며,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규칙 지키는 일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해 준다. 삶에 필요한 지식은 학교 공부 시간에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이들은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가운데 배운다.

이 소중한 놀이가 이제 더는 아이들 삶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요새 아이들은 심지어 놀이에 대한 정보조차 공부로써 얻는다. 이를테면 역사 시간에 아이들은 자치기, 사방치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널뛰기와 같은 놀이가 우리 전통놀이임을 배운다. 그리고 시험을 칠 때면 '겨울철 민속놀이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자신 있게 답을 쓴다. 하지만 정작 자치기와 사방치기를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놀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놀이에 대한 지식을 배우기 때문이다.

놀이는 아이들의 고유한 권리이다. 그것은 어른들이 선심을 써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마땅히 누려야 할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고 그 권리를 찾아 줄 때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안다. 요즈음처럼 바쁜 경쟁 사회에서 "철수야, 놀자!"는 메아리 없는 독백, 또는 '민폐'를 끼치는 외침이 될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이다. 이 현실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만 알면 희망은 있다.

서정오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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