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가 왜 붉은지, 가을 석양에 묻다
남녘에서 산들은 모두 남(南)으로 달린다. 순탄한 산맥도 가파른 산맥도 한사코 머리를 남쪽 바다로 향해 치켜들고 있다. 줄지어 남해에 당도한 산들은 끝끝내 바다로 뛰어든다. 그러나 남해, 노년의 바다도 저항이 만만찮다. 바다는 그녀의 영역 안에 그들을 순순히 받아줄 리 만무하다.
저돌적으로 밀고 드는 산맥과 완강하게 밀어내는 바다. 그들의 힘겨루기로 반도 남쪽 해안은 뻣뻣한 갈기가 섰다. 그런 바닷가 갈기 사이사이에는 어김없이 바다가 밀고 들어 만(灣)을 만들어낸다. 크고 작은 만에는 바다와 산들의 비무장지대가 있다.
갯벌. 순천만도 그렇게 만들어진 비무장지대, 갯벌이다. 바닷물이 밀면 바다의 영역이 되었다가, 바닷물이 썰면 다시 뭍의 영역이 되는 순천만 갯벌. 그 불모의 땅에도 주인이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갈대들이 뿌리를 내려 무수한 생명체를 불러들이고 그들을 양생하기도 한다. 또 광활하게 자리 잡은 갈대는 바다와 육지의 다툼을 가려 넉넉히 완충해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런 순천만 갯벌의 미시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기보다 오히려 순천만 갈대밭이 빚어내는 풍광에 눈길을 주었다. 풍광 가운데서도 가을날 갈대밭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해를 '일품'(一品)'이라고들 한다.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16:00
낙조를 보러 서둘러 달려온 길, 아직 가을 햇살은 쏟아지는 창날과 같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나섰는지 평일임에도 주차장에는 차들로 빼곡하다. 진득진득하고 젓국 내음 나는 갯벌을 상상하며 도착한 순천만은 깔끔하다. 생태공원으로 꾸며진 갯벌은 잔디가 깔리고, 분수가 솟고, 꽃들이 심겨져 있다. 갈대 이엉을 엮어 올린 원두막들이 있고 갈대로 발을 친 담장들이 둘러져 있다.
갈대밭 탐방로 초입에는 갯벌 사이로 난 물길 구석구석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탁류는 흐름이 멈춘 듯 고요하다. 탐방로는 나무데크로 잘 정비돼 사람들이 그 인공의 길을 따라 전시장을 돌듯 줄지어 밀고 든다. 양옆 하얀 꽃이 만발한 갈대숲 사이 사람들의 머리 행렬만 길게 늘어서 있다.
아직 시간이 이른 때문인가. 데크를 따라 걷는 갈대숲은 익명의 공간을 보장하지 못하고, 젊은 남녀들이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기에 부적절하다. 젊은 그들, 하얀 갈대꽃이 만발한 저 어디쯤에서 가벼운 포옹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16:30
천천히 걷는 탐방로. 흰 갈대꽃 무리는 가을바람에 가볍게 쓸렸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갯벌은 물때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물은 멀리 밀려났고 뻘(개흙의 방언)바닥은 게 구멍들로 숭숭하다. 바깥 일에 호기심이 생긴 농게 한 마리는 구멍 턱에 집게발을 걸치다가 술 취한 사람들 노랫소리에 얼른 기어든다. 물이 고인 웅덩이 옆 뻘에는 짱뚱어 새끼들이 뒹굴어 진흙뭉치가 되어있다.
저어새인지 왜가리인지 흰 새 한 마리가 뻘밭에 머리를 박고 뒤지다 사람들의 소란에 멀리 날아가 버린다. 흰 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다시 민물도요새 한 마리가 날아와 두어 번 먹이를 찾는 시늉을 하더니 금세 날아오른다. 안내판에는 1년에 색깔이 7번 변한다는 칠면초나 원기둥 모양 줄기에 마디가 튀어나왔다는 퉁퉁마디 따위의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룬다고 적고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탐방로 데크 옆 나룻배 형태의 조형물 쉼터가 있고 배는 돛을 날리고 있다. 돛에는 '순천만'이란 글이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신이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무렵 당신은 먹먹한 외로움에 옆구리를 쓸어안으며 이곳 순천만을 찾아도 좋다. 그러면 더 오래된 외로움이 당신을 안아주리라/ 그 텅 빈 적막에 저녁이 찾아오면 당신은 젖은 그 눈시울이 되어 순천만의 일몰을 바라보아도 좋다."(하략)
17:00
나무 데크 탐방로를 거쳐 배어나는 땀을 닦으며 용산전망대가 있는 산비탈 계단을 오른다.
겹겹의 산너울들은 이내에 가려 흐릿하고 가을 타작마당 연기는 산허리를 휘감았다. 귓불을 간질이는 미풍에 땀을 식히며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습지는 자연이 그려낸 오묘한 걸작을 한눈에 보여준다. 한사리 때에도 바닷물이 깊이 침범하지 못하는 갈대밭은 마치 연못에 떠있는 수련잎처럼 동그랗게 무리지어 있다. 저것들이 여름날에는 푸른색으로 틀림없이 연잎 형상을 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연한 갈색으로 사람이 다듬어 놓은 듯하다. 주변으로 만조 때 물이 드는 뻘밭은 가을날 오후 햇살에 번들거리며, 큰 물길을 향해 사행(蛇行)한 작은 물길들의 흔적이 역력하다. 습지는 진한 고동과 흑회색의 바탕색이 안정되었다.
바다를 향해 멀리 달려온 강물은 바다의 텃세에 주눅 들어 곧장 바다로 잇대지 못한다. 유장한 강물은 크게 한번 굽이쳐 강어귀를 맴돌다 비로소 바다에 닿아 있다. 지금 바다는 달이 크게 들숨을 쉬어 물이 멀리 밀려나고, 강물은 순조롭게 바다로 흘러든다. 넓게 몸을 드러낸 갯벌은 바다의 경계를 허물고, 부표가 드러난 얕은 바다 양식장은 흡사 홍수 난 7월의 들판이다. 달이 날숨을 쉬면 다시 바닷물은 습지를 밀고 들어 갈대의 발목을 적실 것이다.
17:30
해가 기운다. 해 스스로는 찬연하다고 믿는지 모르지만 햇살 속 날카로운 바늘들은 모두 빠졌다. 이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 빛 아래 서 있는 자들은 이 빛 속을 잘못 들어왔다. 이 낱낱의 빛 속에 묻어나는 외로움은 젊은 사람들이 즐겨 볼 것이 못 된다. 잘게 부서지는 금빛 강물은 너무 오래 보지 말라. 눈이 아려 눈물 흐를라. 그러나 어쩌랴 엇비낀 빛은 이미 시린 옆구리를 비추고 사람들은 제각각의 외로움 속에 섰는 것을….
해가 진다. 갯벌의 배들은 뻘밭에 닻을 내린 지 오래고 지상의 시간은 정지한 채이다. 태곳적부터 있었던 풍경은 오늘도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서 인간이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해가 기우는 갯벌에서 간섭할 것이 없는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는 더 이상 포식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다만 자유롭게 하늘을 활강하는 새들만이 최상위 계층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은 자줏빛이다. 발갛고 둥근 것은 이미 마지막 빛을 토하며 서쪽 산 너머로 스러진다. 빛도 사그라진다. 상기되었던 갯벌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노을 속에서 금빛으로 쪼개지던 강물은 밀랍처럼 흐름을 멈춘 채 고요하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아득해 보인다.
18:00
이 순간, '지는 해의 마지막 빛 한 줄기가 어디에서 사위어 가고 있을까'라고 묻고는 '양로원 창가, 군밤장수 손등, 반쯤 남은 소주병, 동생 업은 아이 머리핀에 남아 있을 것'이라던 어떤 글이 생각난다. 그 빛 중 한 줄기가 이제 막 묵은 강물 속으로도 사위었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야산 정상, 이들은 돌아갈 곳을 잃은 듯하다. 충만한 무엇을 잃어버린 탓일까, 절절한 외로움에 넋이 나간 것일까, 모두들 돌아서는 발걸음이 주춤주춤한다. 한낮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너와 내가 불러보는 세박자' 가락도 잦아든 지 오래이다.
멀리 갈대를 보러왔던 어린아이는 엄마 등에서 잠이 들었고, 연인들은 말없이 서로를 껴안은 채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푸른 하늘에는 살찐 반달이 떴다. 새들은 편대를 지어 끊임없이 서쪽으로 날아간다. 저것들이 가창오리 떼인지 기러기인지 궁금하다. 갈대숲 속에서는 간간이 큰 새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짝을 찾는 것인지 두려움에 질러보는 소리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아득한 곳,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밤을 준비하는 불빛들이 하나 둘씩 밝혀진다.
갈대와 석양과 새들의 하모니는 막을 내렸다. 과연 쇠락하는 것은 생성하는 것보다 더 큰 여운을 남기는가? 붉은 해의 크기만큼 가슴속 뭔가 하나쯤이 빠져나간 듯하다. 직립하는 인간의 발걸음은 어둠 속에서 허청거린다. 적막 속에 흐르는 강물도 가을바람에 속의 갈대꽃도 흔들린다. 세상의 장렬한 최후를 목격한 것들이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오늘 위안하자, 왜 가을 석양이 서러운지, 어떻게 노을빛이 갈무리되는지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음을. 또 그것들이 왜 그리 서러운지도 알 수 있었음을….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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