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위선생의 盡忠碣力 용맹 안중근도 본받아"

입력 2009-10-28 10:11:16

27일 왕산 기념관에서 이길수 사무국장 등 직원들이 기념관내 안중근 의사의 재판내용 중 허위 왕산 선생을 높이 평가한 글 앞에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27일 왕산 기념관에서 이길수 사무국장 등 직원들이 기념관내 안중근 의사의 재판내용 중 허위 왕산 선생을 높이 평가한 글 앞에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100여년 전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왕산 허위 선생을 높이 찬양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전하면 사람들이 전시된 자료를 한 번 더 살펴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100주년(10월 26일)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지난 9월 28일 구미시 임은동에 개관한 허위 왕산 선생의 기념관이 안 의사와 허위 선생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기념관 내에 마련된 각종 자료 가운데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재판 내용을 비롯해 안 의사가 허위 선생을 높이 찬양한 자료 등이 비치돼 있다.

안 의사는 항일 의병 활동으로 1908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돼 일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허위 선생의 의병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허위 선생을 직접 심문했던 일본군 최고지휘자인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도 회고록에서 "몇백, 몇천의 의병장 가운데서도 열력(閱歷)과 성망(聲望)이 뛰어나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역학에 밝았다"고 기록했고, 그를 국사(國士)라 칭하고 구명운동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 의사는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碣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들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를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고 허위 선생의 의병활동 정신을 높이 기렸다.

개관 이후 주말에는 100여명이, 평일에는 30~40여명이 찾는 왕산 기념관에는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체결, 황제 강제퇴위, 정미7조약체결,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에 의병장으로 활동을 벌였던 왕산 허위 선생의 생전 의병활동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선생은 1907년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을 조직, 1908년 서울진공에 나섰다 일본군에 붙잡혀 그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져 '순국 1호'를 기록했다.

왕산기념관 이길수 사무국장은 " 관람객들이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와 사연을 모른 채 그냥 지나치기 일쑤여서 허위 선생의 의병활동과 함께 안 의사가 허위 선생을 높이 평가한 재판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면서 "설명을 듣고는 두 사람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창구기자 cgjung@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