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춤은 당신들의 말보다 달콤하다
누군가 술자리에서 그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한 글자야. 술도 그렇고, 밥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옷이나 집처럼 의식주가 모두 한 글자다. 호흡도 숨이고, 사랑도 정이고, 신(神)이나 별, 달, 해처럼 중요한 것은 모두 한 글자다. 삶도 마찬가지다.
춤도 댄스나 무용, 무도(舞蹈)라는 말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신체를 통한 의사전달이란 의미가 더욱 확실하게 다가온다. "댄스하실까요?"나 "무용하실까요?"보다 "춤추실까요?"가 훨씬 정감 넘치고, 또 간절해 보인다.
춤을 소재로 한 영화들 또한 대부분 화끈하고 정열적이다. 춤을 통한 사랑의 완성이나, 삶의 애착, 열정의 성공드라마 등을 그려낸다. 일본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쉘 위 댄스'(1996년)는 삶의 충전을, 얼마 전 타계한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80년대 추억의 영화 '더티 댄싱'(1987년)은 진실된 사랑을, 제니퍼 빌즈의 청순미가 돋보였던 '플래시 댄스'(1983년)나 제시카 알바의 '허니'(2003년)와 같은 영화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춤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쉘 위 댄스'는 무기력한 중년의 나른함을 춤으로 이겨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성공적인(?)이 삶을 살고 있는 샐러리맨 수기야마(야쿠쇼 코지). 어떤 유혹도 뿌리치고 땡 하면 집으로 가는 모범가장에다 도쿄 외곽에 예쁜 집도 마련해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그런데도 가슴 깊이 밀려드는 이 무기력증은 뭐란 말인가.
태엽 인형 같은 느낌, 기계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밖을 무심히 보던 그의 눈에 사교댄스 교습소가 띈다. 창가에 서 있는 여인 마이(구사가리 다미요)를 보는 순간 가슴이 술렁이기 시작하고, 어느새 그는 댄스교습소 계단을 오른다.
한때 '춤'이 '바람'과 결합되면서 춰서는 안 될 가정파탄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불온한 사모님들의 자기들만의 '예술'로 치부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부가 함께 사교춤을 추거나, 모임에서도 춤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등 건전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춤이 주는 생명력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기야마는 춤으로 인해 자신을 찾고, 부부의 관계도 다시 짚어보는 계기도 된다. 돈만 벌어다주는 기계가 아니라, 그 속에 아직도 뜨거운 열정이 남아 있는 한 인간으로 재확인하게 된다.
수기야마가 추는 춤이 '퀵 스텝'(Quick Step)이다. 1921년경 미국에서 유행한 찰스턴이란 춤이 발전된 것이다. 찰스턴은 4박자의 빠른 템포에 맞춰 양 무릎을 붙인 채 발을 번갈아 차올리며 추는 춤이다. 미국 금주법 시대를 상징하는 춤으로 1925년 미국 보스턴의 한 클럽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요동치며 춤을 추는 바람에 건물이 무너져 5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수기야마가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이 춤을 추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자극을 빗댄 것이다. 퀵 스텝의 기본 리듬이 슬로, 슬로, 퀵, 퀵이다. 두 번 느리게, 두 번 빠르게이다. 늘 바삐, 한결같이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과도 같다.
'쉘 위 댄스'를 미국버전으로 리메이크 한 '쉘 위 댄스'에서 리처드 기어가 추는 춤은 폭스트롯(Fox Trot)이다. 정확히 말하면 템포가 느린 슬로 폭스트롯이다. 폭스트롯은 '여우걸음'이란 뜻으로 여우가 사냥감을 향해 살금살금 걷듯이 추는 춤이다. 남자는 거의 발을 모으지 않고 추며, 여자는 몸을 회전하는 것이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단히 우아하며 유연하고 프로 선수도 10년 이상 걸려야 이 춤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만큼 어려운 춤이다.
열정적인 춤으로 라틴댄스를 빼놓을 수 없다. 바네사 윌리엄스 주연의 '댄스 위드 미'(1998년)와 문근영 주연의 '댄스의 순정'(2005년)에는 다양한 종류의 라틴댄스가 나온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는 쿠바의 민속춤 룸바, 또 룸바의 변형인 차차차, 브라질 리오카니발에서 열광적으로 추는 브라질 민속춤 삼바 등이 등장한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니콜 키드먼의 '물랑 루즈'를 만들었던 호주 출신 감독 바즈 루어만이 1992년에 만든 '댄싱 히어로'에는 파소도브레가 나온다. 스페인 투우사를 표현하는 원스텝 댄스의 열정적인 민속춤으로 경쾌하고 씩씩하다. 남자는 투우사인데, 여자는 뭘까? 소 또는 투우사의 망토를 의미한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투우사 복장으로, 여자는 빨간 드레스 차림으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허리 아래로만 춰야 하는 볼륨댄스 무도장의 엄격한 규칙을 위반하고 자신만의 춤을 추는 주인공 남자의 꿈과 야망을 파소도브레라는 춤을 통해 강하게 보여준다.
이성재, 박솔미 주연의 '바람의 전설'(2004년)에는 자이브가 잘 표현된다. 박솔미가 횡단보도에서 혼자 생각하다가 스텝을 밟고 나아가다 덤프트럭에 치일 뻔했던 춤이 자이브다. 6박자에 8개의 스텝을 밟는 빠른 춤이다.
프랑스영화 '살사'(2000년)는 가장 정열적인 라틴 댄스 중 하나인 살사를 그리고 있다. 클래식 음악으로 촉망받던 한 천재피아니스트가 살사의 매력에 빠지고, 살사를 추면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음식의 양념소스라는 살사의 원래 뜻처럼 격렬하고 화끈하게 펼쳐진다.
이들 영화 속 춤이 둘이 함께 추는 사교춤의 범주라면 최근 젊은 감각의 영화들은 대부분 혼자서 강렬하게 흔드는 춤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스텝업'(2006년)이나 '허니'는 춤 대결을 그리는 등 호전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도 춤의 매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함께 추는 것이다. 이 가을, 음악에 맞춰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춤추자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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