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 도심 한복판인 우리 동네에 허파 같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시장이지요. 옛날에는 아주 큰 시장이었지만 시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겨우 점포 몇 개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부분 할머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생선가게, 과일가게, 떡집, 그러고 보니 떡집 할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며느리가 대신하고 있는데 그분 또한 나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돼지국밥집이 있고 정육점, 만물상이 있습니다. 만물상집 할머니도 얼마 전 아들 내외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손녀 보는 재미에 폭 빠져 있습니다.
허리가 반쯤 구부러진 채소가게 할머니 주위에는 소일거리가 없는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는 듯해도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야채를 사면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가지런합니다. 그곳에서 시래기국을 구수하게 끓이는 방법과 나물 말리는 지혜도 배웠습니다. 아, 참! 칼국수를 밀어 파는 할머니도 있군요. 그 좌판 주위에도 늘 서너명의 할머니가 앉아 있는데 제가 그 앞을 지나가면 칼국수 맛있다고 사가라고 거드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게 칼국수를 끓여먹는 날도 있었지요.
제가 이 시장을 허파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을 다녀오면 장바구니만 채워 온 게 아니라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온 듯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바쁜 일상에서 숨 돌리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는 물건을 안 사도 아는 체를 하고, 저 역시 할머니 한 분이 안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 가게 할머니께 안부를 물어보게 됩니다.
또 제가 오랜만에 시장을 가면 '그동안 뭐 먹고 살았노'하고 파 한 뿌리라도, 콩 한 줌이라도 더 얹어 주려는 그 손길에서 육친의 정 같은 걸 느낍니다. 한 개라도 더 팔려고 늦은 밤까지 있거나 날씨가 궂을 때는 그만 들어가시라는 염려를 보태어 줄 정도로 친해진 할머니들, 아마 그분들은 평생을 그렇게 사셨을 겁니다. 몸을 안 아끼고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서 그 자리를 지키셨을 겁니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라는 공동체, 삶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삶의 장터를 벗어날 순 없겠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도 포함될 것입니다. 간신히 백열등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썰렁한 저녁 시장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가서 서로의 온기로 훈훈해져 보는 건 어떨까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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