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토 히로부미 '100년만의 만남'] <6>결전의 순간

입력 2009-09-12 07:25:56

하얼빈 울린 7발의 총소리…'간적' 쓰러지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직후 저격당한 장소에 세워 놓은 흉상.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 인민들이 부숴버렸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직후 저격당한 장소에 세워 놓은 흉상.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 인민들이 부숴버렸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909년 10월 26일부터 뤼순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5일간 지하실에 갇혀 있던 당시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 건물. 현재는 화원(花園)소학교 건물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909년 10월 26일부터 뤼순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5일간 지하실에 갇혀 있던 당시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 건물. 현재는 화원(花園)소학교 건물이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직후 저격당한 장소에 세워 놓은 흉상.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 인민들이 부숴버렸다.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사망 직후 저격당한 장소에 세워 놓은 흉상.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 인민들이 부숴버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드디어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총소리... 세계는 깜짝 놀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순간

오전 9시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 구내로 들어왔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라오자 이토는 "일본 정부의 뜻에 따라 귀하를 만나기 위해 만주에 왔다"고 인사했다. 코코프체프는 30분간 대화를 나누다 이토에게 의장대 열병을 부탁했다. 열병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이토는 정장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거부했지만 코코프체프가 거듭 요구하자 이를 수락한 뒤 열차에서 함께 내렸다. 각국 영사단 앞까지 다가가 인사를 끝내고 방향을 틀자 환영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열병 행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 차가운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순식간에 7발의 총성이 잇따랐다. 그와 동시에 이토의 몸이 튕겨지듯 흔들렸고 뭔가 의지할 것을 찾는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이토 뒤에 있던 하얼빈 총영사 카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모리 야스지로, 만주철도이사 다나카 세이지 등 3명도 총을 맞고 휘청 넘어졌다.

이토의 비서 무로타 요시후미가 쓰러진 이토를 열차내 객실로 옮겼고 중앙의 큰 테이블에 모포를 겹쳐 깔고 즉석 침대를 만들었다. 일본인 의사가 이토의 옷을 벗겼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에서 선혈이 넘쳐 흘렀다. 상처에 거즈를 댔고 이토에게 브랜디를 권했다.

'의사 오야마의 진단에 의하면 이토는 총알 3발이 모두 들어간 곳만 있을 뿐 나온 구멍이 없었다. 첫번째 총알은 우상박(右上膊) 중앙 바깥에서 관통해 수평으로 들어가 가슴 안에 다량의 출혈을 유발시켰다. 두번째 총알은 오른쪽 팔꿈치 관절 바깥쪽으로 들어가 흉막을 관통해 왼족 늑골 밑에 박혔으며 세번째 총알은 상복부의 중앙에서 우측으로부터 들어가 좌측 복근(腹筋)에 박혔다.'

이때 러시아 측이 조선인 한명을 저격범으로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비서가 이를 알리자 이토가 신음하듯 "그런가,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했다. 그것이 이토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토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비서가 이토의 입에 귀를 대고 "각하, 뭔가 유언을..."이라고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비서가 쥐고 있던 이토의 손에서 맥박이 점차 약해졌고 오전 10시 완전히 멈췄다. '바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69년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이토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사람이 누구이건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토는 밑바닥 인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생을 마칠 가능성이 높은 위인이었다. 이를 감안할 때 마지막에도 자신의 생애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논픽션작가 미요시 도오루)

일본측 기록을 바탕으로 했지만 일부에서는 이토가 말 한마디 못하고 30분만에 절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안중근의 의거 순간(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중심으로)

안중근은 차 파는 집에 앉아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이토를 기다렸다. 9시쯤 되자 역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와 닿았다. 어느 시각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였으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오자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길 업화(業火)가 머리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안중근은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있게 나가 (러시아)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에까지 이르렀다. 앞을 보니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도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아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횡행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둘사이 거리는 5m 남짓이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며 곧 단총(벨기에제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신속히 4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속에서 일어났다.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한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 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잇따라 쏘았다.

만일 죄없는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안중근이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기 전 총을 내던진후 러시아말로 '코리아 우라(대한제국만세)'라고 세차례 외쳤다는 기록도 있다.

안중근은 훗날 재판에서 '간지(奸智)에 뛰어난 간웅(奸雄)을 처단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상대를 '바보'와 '간웅'으로 칭했다. 신주백 연세대 연구교수는 "'간웅'과 '바보'로부터 시작된 충돌의 기억이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도 한일간에 이토에 대해 '침략의 지휘자'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상반된 평가가 그대로 남아 있다"며 "한일간에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대중적 이미지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co.kr 장성혁 동영상기자 jsh0529@msnet.co.kr

[안중근 의사 조카며느리 안로길 할머니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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