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4)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종부 최소희 여사

입력 2009-09-10 10:28:19

"큰집 사람은 주위 감싸 안을 줄 알아야"

추석을 한달여 남긴 들녘에는 벌써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지척이라 자주 찾았던 하회마을이지만 오늘 따라 관광객이 눈에 띄지 않아 한가로운 여느 농촌마을처럼 여겨진다.

차분함 속에서도 무언가 모를 정돈돼 있는 분위기가 낯설다. 하회마을 길은 언제나 정겹다. 어릴적 뛰어놀던 고향마을의 돌 담장길이며, 꼬불고불 끊길 듯 이어지는 골목길의 서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가슴 한켠에 아련한 고향의 향기를 전해주는 듯 하다.

충효당 안채로 들어가니, 문풍지가 벗겨진 문들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충효당 안주인인 종부 최소희(81) 여사를 찾는다. 늘상 입고 있던 한복차림이 아닌 오늘은 편한 평상복을 입은 할머니가 한 손에 걸레를 든 채 미소를 띠며 바라본다. 미리 연락을 취해 둔 터라 금방 알아보시는 할머니. "사진도 찍는다고, 사진은 안 찍으면 안 되나, 한복도 입어야 하고…."

얼른 할머니 손에 들린 걸레를 건네받으며 청소 부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종부는 단아한 모습으로 방으로 안내한다. 도배를 새로 한 듯한 방안에 단아하게 앉아 있는 종부에게서 수백여년을 한결같이 이어져온 유가(儒家) 여인네의 기품이 느껴진다. "내일 모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최종심사단이 하회마을에 와요. 그래가 오늘 이리 번잡하네."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빨리 등재돼야 하는데'''.

"스무살 때 하회마을에 시집 왔으니까. 올해 내가 여든하나지. 선이 어딨어, 집안 어른이 가라고 하니깐 신랑 얼굴도 모르고 왔지."

시집 올 때를 회상하는 종부 최소희 여사는 "그때는 다들 어려웠어요. 내가 경주 월성 최간데, 만석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거든"이라며 "신행 올 때 경주서 안동까지 조흥은행 두치차(지프차) 타고, 살림은 트럭에 싣고 왔어"라고 한다.

당시 신행에서는 하회마을 입구에서 가마를 타고 들어갔다. 이부자리와 시댁식구들 옷감, 그리고 유과며 약과, 엿, 약식, 다식 등 음식도 많이 장만해 가지고 왔다.

최소희 종부는 "당시에는 신행을 석달이나 일년 만에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삼일 만에 했어. 우리 주인(종손어른)은 학생이어서 서울에서 의과대학에 다녔어. 방학 때만 얼굴을 봤지"라 회상한다.

경주 최부자집으로 유명한 월성최씨 2남 4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종부는 경주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부산 동래여고를 다녔다.

"기숙사에서 생활했지. 방학 때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어. 당시 상황이 안 좋으니깐, 수업 받다가도 방공호로 대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라며 "애들 교육(?) 나는 애들한테 공부 하지 말라고 해.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늘 애들한테 이야기하지. 훌륭한 조상 밑에서 욕되게 살지 않는 것. 그게 제일이라고…."

◆훌륭한 조상 욕되지 않게 사는게 첫번째 교육

충효당은 풍산 류씨 서애파의 종택으로 서애 선생이 농환재에서 별세한 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장손인 졸재 류원지 선생이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여자로 태어나서 서애 선생 같은 훌륭한 분을 모신다는 것만해도 나는 자랑스러워. 종부라는 것은 운명 같은 거지.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모시는 거지. 지금도 경상감사 마다하고 서애 선생 모시길 잘했다고 생각해"라 한다.

종부는 "신행 와 남편이 직장을 잡으면서 쭈욱 서울 생활 하다가 마흔다섯에 다시 하회로 내려와서는 고생스러웠어. 하지만, 서애 선생 모신다는 자랑 하나로 그 고생스러움을 잊을 수 있었지"라고 회상하면서"힘든 일이 한두 가지 겠나. 농담 삼아 우리 영감한테 이야기하곤 해. 내가 종손하고, 종부는 당신이 하면 안되겠냐고. 그럼 우리 주인이 웃으면서 그러라고 하지"라며 웃는다.

서애 선생 불천위 제사에 사용되는 음식으로 중개라는 것이 있다. "서애 선생이 즐겨 잡숫던 건데. 500년전에도 중박개로 해서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밀가루에 막걸리, 꿀, 설탕하고 소다 약간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 너비 4센티, 길이 12센티로 부쳐내지요." "술은 내가 종부하면서, 친정에서 배운 법주를 사용합니다. 전에는 겹술이 아니고, 홑술로 담갔지. 친정에서 하는 거 보고. 겹술은 한 달간 발효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지만 맛이 뛰어나요."

종부하면서 아쉬웠던 일이 없느냐는 질문에 "디스크 수술 후에 조리를 잘 못해서 요즘은 잘 서있지를 못해. 팔십 난 노인이다 보니 안 아픈 곳이 없어. 그러다 보니 (종부로서 종가 살림살이에)조금 소홀해 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한다.

종부는 "다른 데도 마찬가지지만 하회마을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어. 그래도 일년에 열두차례씩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마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지"라며 "지금 며느리가 마흔다섯인데 '며느리가 종부를 할 때쯤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줄어들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까 자나깨나 걱정이지"라며 자신의 뒤를 이을 종부 걱정까지 한다.

이 때문에 종부는 자신이 좀더 살아 며느리가 아이들 공부 마치고 생활에 여유를 찾는 등 종부로서의 준비를 더 한 후에 하회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특히 자신은 오랜 서울생활과 인품좋은 시어른의 보살핌으로 종부로서의 고된 시집살이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종부는 "내가 해 왔던 일을 내 며느리가 잘 받아서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거지. 늘 며느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큰집 사람들은 항상 포용력 있게 주위 사람들을 감싸 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거. 오는 손님 물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잘 차리는 제사상보다는 정성을 들이는 상이 돼야한다는 것"이라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흐트러짐이 없던 종부는 불미한 사고로 맏딸을 잃은 대목에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살아 오면서 힘든 일이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는 마음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어?" 종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하회마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사)문화를가꾸는사람들 강병록 culturepd@gmail.com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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