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으로 제조된 영웅의 길 "It's a long road~"
'람보' 1편(1982년) 이 만들어진 지 27년이 지났다.
슈퍼 파워 때문에 슈퍼 파워가 그립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악한 힘에 딸까지 내놓고 망연자실하던 마을에 망토를 뒤집어쓰고 홀연히 나타난 서부극의 영웅처럼 람보가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부터 람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4편까지 나왔지만 '람보'는 제목이 람보였던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 구분된다. 1편의 원제는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였다. '먼저 건 시비' 정도가 될 이 제목이 2편부터 '람보'라고 당당히 제목에 올라선 것은 당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시대적 분위기가 한몫했다. 냉전이 무너지면서 미국 사회에 내재된 영웅 부재의 불안감을 '람보'라는 가상 인물이 씻어준 것이다.
1편부터 '람보'라는 이름을 단 것은 일본의 배급사였고, 한국도 그대로 따랐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특별히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후문도 있다.
미국서도 2편부터 '람보'라는 이름을 달고, 본격적인 오락액션영화로 미국식 힘의 대변자가 되었지만 1편은 그렇지 않았다.
1편은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택시 드라이버'와 같은 사회물에 가까운 영화였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영혼에 상처를 입고 귀환한 병사에 대한 사회의 냉대와 당위성 없는 전쟁에 대한 반성, 살인기계로 살다 이제 사회 부적응자가 된 한 인간의 분노 등이 녹아든 영화였다.
원작은 데이빗 모렐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단 한 사람의 군대'였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그린베레 출신의 람보(실베스터 스탤론)가 전우를 찾아 로키 산맥에 위치한 어느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그러나 전우는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다. 고엽제의 후유증이었을까. 건장했던 전우는 바짝 마른 이불깃처럼 죽었다.
마을 보안관 윌(브라이언 데니히)은 부랑자 행색의 그를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람보는 월맹군 포로수용소에서 고문을 받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한적한 시골 마을은 전쟁터가 되고 만다.
원작 소설에서는 람보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도 람보가 자살하는 또 다른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지만, 너무 침울하다고 판단해 람보를 살려냈다. 그 바람에 1편에 이어 속편이 가능해졌다.
1편은 원작자도 만족감을 표시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수백만달러짜리 장비도 마음대로 했는데, 사회에선 주유기 하나도 제대로 못 만지게 한다"며 오열하던 람보는 큰 감동을 주었다. 조국을 위해 헌신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뿐이라는 람보의 말은 참으로 공감되는 항변이었다.
그가 전쟁을 마감하고 수갑을 찬 채 경찰서를 나설 때 주제곡 '잇츠 어 롱 로드'(It's a long road)가 흐른다. 1954년 캐나다 출생의 가수 댄 힐이 부르는 안타깝고 슬픈 곡이다. '그것은 먼 길이에요. 혼자 힘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이 당신의 꿈을 산산이 부숴버릴 때는 마음이 아프죠. 그것은 진짜 전쟁이에요. 내가 말하잖아요. 내가 나 자신의 공간에서 나로서 존재하는 곳, 내가 자유로운 곳, 그곳이 내가 있고 싶은 곳이에요. 매번 내딛는 발걸음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에요. 쉴 틈도 없이 마음의 고통뿐이죠. 오, 진정한 남자는 승리하는 자입니다.'
존 람보의 심정을 비장한 가사에 넣은 이 곡은 한국형 팝 명곡 중 하나다. 팝송 중에서 유독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곡이라는 뜻이다. F.R.데이비스의 '워즈'(Words)나 가제보의 '아이 라이크 쇼팽'(I like Chopin), 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 등이 그랬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길을 나서는 한 남자. 그의 또 다른 험난한 길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곡으로 인해 한없이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전쟁 병기로 길들여진 한 인간의 긴 여정을 처연하게 보여주었다.
베트남(2편)과 아프가니스탄(3편)을 넘어 지난해 개봉된 4편의 배경은 미얀마이다. 잘못된 지난 시절에 대한 보상을 위해 람보는 혼자 고군분투한다. 버려둔 포로들을 데려오거나, 뜬금없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참으로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혔던 구소련의 망령을 깨부수기도 한다.
'람보'는 '록키'와 함께 실베스터 스탤론의 필생의 시리즈물이다. 2007년 '록키 발보아'로 록키 시리즈를 끝맺었다. 사업가로 변신한 노년(?)의 록키가 다시 링에 선다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로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런 그가 '람보'마저 종지부를 찍겠다며 4편 '람보4:라스트 블러드'를 들고 나오자 일각에서는 '스탤론의 못 말리는 허영심'이라며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댄 힐의 노래처럼 다분히 미국식으로 제조된 영웅의 길은 먼 길을 돌아 이제 끝이 났다. 그러나 커다란 눈이 너무 무거워 아예 축 처져 보이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입을 실룩거리며 뱉어내던 "날 내버려둬, 날 내버려두란 말이야"라는 대사는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세상사 커다란 벽을 느껴본 모든 남자들의 항변 아닌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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