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나가사키의 두 얼굴

입력 2009-08-18 07:00:00

일본이 총선 때문에 시끄럽다. 장기 불황의 여파로 입지가 좁아진 자민당은 어떻게든 표심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언론과 정가가 시끌벅적할 뿐 시민들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자민당이 선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것 중 하나가 북한의 위협, 즉 안보 문제다. 이번에도 북한 핵 실험을 빌미 삼아 불안감을 증폭시키려 하지만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다.

9일은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2분이었다. 이 날을 잊지말자며 매년 행사를 연다. 올해도 나가사키 도심에는 사이렌이 울려퍼졌고,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낮시간 평화공원에서 열린 행사에는 아소 다로 총리도 참석했다. 총선을 앞두고 당연한 행보다. 극우파는 북한 핵 실험을 일본 재무장을 위한 빌미로 삼으려고 안달이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저녁 무렵, 다른 행사가 열렸다. 일본 천주교 나가사키대교구 주최로 열린 '평화기념제'. 핵무기의 위험을 알리고 전 세계의 비핵화를 촉구하는 동시에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다. 여느 때와 달리 미국의 가톨릭 사제들이 참석했다. 비록 미국 정부나 국민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연단에 선 신부는 그곳에 모인 시민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의 뜻을 전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시민들은 고개를 떨구었고, 백발의 한 노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폭 투하로 벌어진 두 행사의 얼굴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많이 다르다. 일본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행사가 열린 평화공원도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원폭이 떨어진 폭심지 일대에 꾸며진 평화공원에는 기념관도 있다. 이곳에는 원폭으로 파괴된 우라카미 성당의 기둥이 보관돼 있다. 나가사키는 일본 가톨릭 교계의 시발점이며, 우라카미성당은 당시만 해도 동양 최대의 규모라고 불릴 정도로 의미있는 건물. 그렇다고 해도 원폭 투하 당시 일본은 막부 시대의 지속적인 탄압 탓에 가톨릭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 교세도 크게 미약해진 상태였다. 원폭으로 기둥 한쪽이 파괴된 신사 입구는 그대로 현장에 방치해 두고, 굳이 성당의 기둥 한쪽을 기념관 내부에, 그것도 처참한 파괴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전시물들 사이에 놓아둔 의도는 무엇일까. 수많은 파괴의 현장을 두고 굳이 성당 기둥을 전시한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의 망상이 빚어낸 처참한 아시아의 모습은 뒤로 한 채 자신들의 피해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아닐까. 부서진 신사 입구의 돌 기둥을 전시했을 때와 성당 기둥의 처참한 잔해를 전시했을 때의 효과 차이는 극명하다.

나가사키에서만 원폭으로 직접 숨진 사람이 7만3천여명. 이들 중 1만여명이 조선인이다. 낯선 땅에서 형체도 없이 시커멓게 그을린 사체로, 혹은 피폭 후유증 때문에 긴 세월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 숨을 거둔 이들은 부지기수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그 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이들이 미국인 신부처럼 비록 늦었지만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었던가. 평화공원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세워진 비석 하나. 이것이 이국 땅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조선인 1만여명의 넋을 기리는 유일한 표지물이다. 일본 정부의 돈 한 푼 받지 않고 조총련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인 신부의 진심 어린 사과에 고개 숙인 일본인, 북한의 핵 실험을 보며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핏대를 세우는 일본인. 광복을 맞은 우리는 어떤 일본을 봐야 할까.

김수용 문화체육부 차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