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 <2>이토의 생애 (上)

입력 2009-08-14 09:48:19

姓도 없는 농민의 아들, 도요토미를 닮으려 했다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어린 이토가 부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마네킹이 재미있다.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어린 이토가 부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마네킹이 재미있다.
28세 때(1868년)의 이토. 칼 차고 앉아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사무라이지만 검술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28세 때(1868년)의 이토. 칼 차고 앉아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사무라이지만 검술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한국인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간적' '침략 원흉' 정도로만 알고 있다. "어떤 일을 한 사람이냐"고 좀 더 물어보면 머뭇거리기 일쑤다. 교과서나 책에 몇줄 나온 대로의 기억이 전부다. 이토를 알아야 잘잘못을 따질 수 있고 안중근 의사의 업적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토의 삶을 현장에서 살펴봤다.

◆미천한 신분에서 성장=일본에서 취재원을 만날 때마다 이토에 관해 물어봤다. 당초에는 메이지 헌법 제정, 초대 내각총리대신, 근대화의 중심역할 같은 업적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토의 '신분'을 들먹였다.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단한 인물'이라는 평가로 귀결됐다. 아직도 일본은 출신과 가문을 중하게 여기는 사회다. 왕이 건재하고 있기에 신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토는 낮은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신분제 사회였던 시대에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의 남다른 능력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이토 출생지인 야마구치(山口)현 히카리(光)시를 찾았다. 히카리는 혼슈 서쪽 구석에 위치한 야마구치현에서도 외진 곳에 있었다. 시모노세키(下關)역에서 느릿느릿한 완행열차를 2번 갈아타고 2시간 20분 걸려 도착한 곳은 이와타(岩田)마을이었다. 집 수가 100호 남짓한 한촌이었다. 역 앞에서 또다시 택시를 타고 논두렁 사이에 난 길을 지나, 산길을 달리니 이토 생가가 보였다. 생가 뒤쪽은 산이었고, 앞쪽에도 산 아래 그리 넓지 않은 논밭이 펼쳐져 있다. 논밭이 얼마 되지 않은 점에 미뤄 마을 전체가 가난했을 것이다.

생가 앞에는 현대식 건물의 '이토공 자료관'(伊藤公 資料館)이 있고 그 옆에는 이토가 지어놓은 유럽풍의 2층 별장이 나란히 서있다. 이토공 자료관은 히카리시가 이토를 기리기 위해 1997년 세운 유물전시관이다. 별장은 1909년 이토가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생가 옆에 짓게 했지만 곧 하얼빈에서 안 의사에게 사살되는 바람에 한번도 쓰지 못했다.

이토의 생가는 일본의 전형적인 농가다. 작은 다다미방 2개와 부엌이 달린 자그마한 초가집이다. 집안에는 어린 이토가 부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실물 크기의 마네킹들이 전시돼 있다. "왜 차 마시는 장면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이 좁고 천장이 낮아 그것 말고는 달리 전시할 방법이 없다는걸 금세 알게 됐다.

이토는 이곳에서 6세까지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당시 조슈번(長州蕃·모리 일족이 다스리던 영지로 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의 거성(居城)이 있던 하기(萩)로 이사간다. 이토의 아버지 주조(十歲)가 번 정부의 연공미에 손을 대 집을 팔아 갚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토공 자료관 한다 데츠지(61·半田哲治) 관장은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산골"이라며 "집에 쌀 한톨 없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은 '고귀한 몸'이 된 인물"라고 자랑했다.

◆신분상승에 집착?=이토는 농민의 아들이라 성(姓)도 없었다. 그 시대엔 무사계급이 아니고는 성을 붙일 수 없었고 사람 대접도 받지 못했다.

이토의 아버지 주조가 하기에 나타난 것은 1846년 무렵이다. 주조는 일용 경작인, 벌목꾼, 탈곡 잡부를 전전하며 머슴살이를 했다. 이토도 어린 시절부터 일을 했다. 이토의 아버지가 무사계급 아래의 주겐(中間·우리로 치면 중인)인 이토 다케베에(伊藤武兵衛)에게 성실성을 인정받아 양자가 됨으로써 '이토'라는 성을 갖게 됐다. 이토가 15세 때의 일이다.

"이토는 낮에는 무사의 시중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씨 연습을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언제나 붓으로 기묘한 인형을 그리고 '이것이 다이코(太閤·최고 통치자) 히데요시'라고 중얼거리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신발을 들고 다니는 신분에서 출발해 정권을 잡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무척 동경했다. 메이지 유신의 역사는 지사들의 시체와 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려는 꿈을 가진 인물은 그 한 명밖에 없었다."

이력 또한 도요토미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토는 운좋게 조슈번 명사의 시중꾼으로 들어갔다가 그가 죽은 후 나중에 메이지 유신의 핵심이 되는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훗날 기도 다카요시로 개명)의 시중꾼이 됐다. 게다가 이웃에 살던 무사 아들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격한 존왕양이 운동가이자 교육자)의 송하촌숙(松下村塾)에 다녔는데 그의 천거로 학당까지 다녔다. 하기에 가면 이토가 살던 집이 송하촌숙과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뒷날 이 학당 출신 청년들이 번의 정치를 이끌고, 나아가 메이지 유신의 주도세력이 되면서 이토도 그렇게 소원하던 신분상승을 이룬다. 행운이 여러번 겹친 셈이다. 하기시 박물관 도사코 신고(36·道迫眞吾) 학예사는 "이토의 출세는 막부 말기 계급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하극상이 극심했기에 가능했다"며 "당시 조슈번내에서 소수의 유신파가 보수파를 제압하기 위해 하층 계급을 대거 중용한 것도 원인"이라고 했다. 이토가 훗날 타협과 조정의 정치인으로 이름을 얻게 된 바탕에는 고집 세고 저돌적인 무사계급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지인들에게 계산적이고 의리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출신' 때문에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글·박병선 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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