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민주당에 보내는 苦言

입력 2009-08-13 10:57:20

1941년 나치 독일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던 소련 지도부는 소련 인민의 항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금기시됐던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활시켰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많은 러시아인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는 인민들의 자기 희생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의 전쟁은 '어머니 러시아'를 구하는 전쟁, 신화에나 나올 법한 괴물 같은 적에 맞선 민족의 복수전이 돼야 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소련의 공식 간행물에 나타나는 빈도가 급격히 줄었다. 대신 '러시아'나 '조국' 같은 단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국가 행사 때 연주되던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인 '인터내셔널의 노래'도 새로운 국가로 대체되었다. 또 13세기 러시아를 침략한 튜튼 기사단을 격퇴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같은 민족 영웅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도 여러 편이 제작돼 필히 봐야 할 영화가 됐다. 이 같은 정치 선전을 통해 소련 지도부는 소련 인민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적개심과 감투 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제기한 '이명박 정부 내 호남 출신 공직자 씨 말리기' 주장과 이야기 구조가 똑같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뉴민주당 플랜'부터 미디어법 국회 통과 이후 장외투쟁까지 대여 공세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지지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미디어법 통과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장외투쟁도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 '호남 공직자 홀대론'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호남 정서를 자극해 지금의 절망적 상황을 타개해보겠다는 계산이다. 소련이 승리를 위해 러시아 민족감정을 자극했듯이.

닮은 점은 또 있다. 소련이 독일에 유린당하는 '어머니 러시아'라는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것처럼 민주당도 '호남 공직자 홀대론'을 통해 '영남 정권에 핍박받는 호남'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지금 호남이 영남 정권에 핍박받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 왜곡이다. 이는 호남의 적대감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영남의 적대감을 낳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국가 운영의 한 축인 제1야당으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무책임한 짓이다. 소련은 승리 아니면 죽음이기 때문에 '어머니 러시아'로 회귀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무엇을 위해 '호남'으로 돌아가려는가. 원내 주도권 확보를 위해? 내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정권 탈환을 위해? 지역 간 적대감을 부추겨 이러한 목표를 이루겠다는 것은-사실이 아니길 빈다-유권자, 특히 호남 사람에 대한 모독이다. 호남 사람은 호남 정치인의 좀비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호남 정서를 자극하는 것은 지역당이란 좁은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겠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민주당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민주당 지지세력이 어찌 호남뿐이겠는가. 민주당의 영남 공략은 계속 실패해왔다.(한나라당의 호남 진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는 정성을 다해 정공법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다. 지역주의 속으로 똬리를 틀고 앉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주의로는 기껏해야 현상 유지밖에 안 된다. 그 이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고립될 뿐이다. 지역주의 집착은 수권 정당으로서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 고갈됐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호남 출신 공직자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의 제기 방식도 문제다. 사실이 그렇다면 원내에 들어가서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따지고 개선을 요구하면 된다. 이런 문제를 구태여 장외에서 그것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호남에 가서 떠드는 것은 그 목적이 인사 편중 해소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정부와 여당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제1야당이 지역당으로 퇴행하는 것은 국민의 후생과 우리 정치의 발전을 위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민주당이 지역주의의 낡은 외투를 벗고 신선한 정치적 상상력과 깊이 있는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새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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