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그림은 문학처럼 읽어야 한다"

입력 2009-08-12 14:53:48

무의식의 마음을 그린 서양 미술/박정욱 지음/이가서 펴냄

파블로 피카소의
파블로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1922). 시선을 위로 향하는 여성은 로고스, 즉 이성을 상징하고 '얼굴 없는 여인'은 파토스, 즉 광기를 상징한다. 이성은 균형을 잡고 달리는데 반해 감성은 균형을 잃은 채 질주한다. 이 그림은 예술의 두 본질, 로고스와 파토스가 손을 맞잡고 달려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예술가들은 별난 데가 있다. 생각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도 많다.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반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엔 심드렁하다. 생활인이 달빛을 등불삼아 물웅덩이를 피한다면, 예술가는 달을 보다가 웅덩이에 발이 빠진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은 있다. 생활인은 흙탕물에 발을 버리지 않을 줄 알고, 예술가는 달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생활인과 예술가는 다른 것을 본다.

별나기만 하면 예술일까? '예술적 광기'와 '병적 광기'는 어떻게 다를까.

예술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예술이 불러오는 감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파토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술 속에는 '파토스'만 있는 게 아니다. 감정밖에 없는 '파토스'는 진짜 미치광이의 감정 상태와 흡사하다. 예술에는 파토스적 광기와 더불어 명철한 이성이 있다. 여기서 이성은 균형과 절제, 논리의 형식을 빌려 표현된다. 이런 것을 '로고스'라고 하는데, 예술은 파토스와 로고스가 한 작품 안에서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고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미(감흥)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재미만 있는 예술 역시 예술이 아니다. 술에 취해 마구 무너지는 것을 '춤사위'라고 하지 않는 이유다. 재미와 '균형', '논리'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예술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이 책의 초점인 서양의 전통 회화에서도 아름다움은 파토스뿐만 아니라 로고스를 포함한다.

요즘 영화 '해운대'가 인기다. 재난 영화의 성공은 확실히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 만약 영화 '해운대'에서 쓰나미 그래픽이 성공적이지 않았다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엄청난 재난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냥 '거대한 파도,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파도, 집을 쓸어버리는 파도'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감흥이 덜하다.

일찍이 재난 그림이 있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은 20세기 재난 영화의 시초였다고 할만하다. 그림은 대규모 재난의 비참한 광경과 절박한 순간에 이른 인간의 광기, 좌절, 상실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은 '메두사호 난파'라는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 '인간 역사의 난파'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그렸을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 시대였다. 인권선언은 무효가 되고 귀족들이 다시 세상을 지배했다. 그림은 '메두사호 난파'라는 사건을 빗대 '프랑스 혁명의 좌초'를 보여준 셈이다.

영화 '해운대'의 쓰나미가 재난일 수 있는 것은 쓰나미가 해운대를 덮쳤기 때문이다. 만약 쓰나미가 아무도 살지 않는 남태평양 어느 섬에 몰아닥쳤다면 사람들은 이를 '재난'이라고 부르는 대신 '기상 현상'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역시 그렇게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그림을 보는 것을 넘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호의 뗏목'과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중에 어느 그림이 더 마음에 와 닿는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해운대'와 애니메이션 영화 '업(UP)' 중에 어른들은 어느 쪽을 더 선호할까.

어른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착한 영화나 그림 혹은 이야기는 왠지 '어린이용'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반대로 추하고 무섭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못마땅하지만 현실적이라고 믿는다.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이야기, 부자이지만 악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야기는 동화의 전형이다. 어른들이 영화 '업' 보다 '해운대'를 선호한다면 그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선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악당 영화, 악당 소설, 추한 그림은 만들거나 그리기 쉽고 대중의 공감을 얻는데도 유리하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본 관객들이 지킬 박사보다 하이드에 더 열광하는 심리랄까. 언제나 선한 배역보다 악한 배역이 리얼리티를 더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이 책 '무의식의 마음을 그린 서양 미술'은 서양 미술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처음 대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출발해 점차 화가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을 파악하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수련' '별이 빛나는 밤에' '최후의 심판' 등 모두 24개의 작품을 수록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각 작품마다 '처음읽기'와 '다음읽기'로 구분하고 있다. '처음 읽기'에서는 그림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학적 주제를 짚어가면서 그림의 정서를 이해한다. '다음 읽기'는 그림의 사회적 배경이나 화가의 성장 과정, 화법의 발전 과정, 화가의 개인적 감정을 통해 그림을 더욱 상세하게 읽는 과정이다.

"그림은 단지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물감 속에 감춰진 감정의 아름다움이다. 그 감정을 알려면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그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림 속의 모든 요소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그림의 깊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지은이는 그림을 '문학처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제 'Behind the Canvas(캔버스 뒤에 감춰진 것들)'는 이 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더불어 책은 현대 회화의 출발과 추상 미술이 등장한 배경, 그 시기에 나타난 현격한 변화를 소개한다.

20세기 모더니즘 이후 회화의 갈래를 정리한 연표, 현대 회화의 변화, 미술 기법과 사조에 대한 설명, 서양 미술사의 주요 사건 등에 대한 정리는 미술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312쪽, 1만5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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