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의 古都를 찾아서]⑥일본 가마쿠라

입력 2009-08-11 16:00:40

日 최초 무사정권 본거지…천연요새 속 옛 사원·별장 그대로

▲가마쿠라시가 내걸고 있는
▲가마쿠라시가 내걸고 있는 '무가의 고도'의 간판 유적지 츠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가마쿠라 막부 성립 후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구획됐고 정치가 이뤄졌다. 신사 크기는 보통 신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뒷산에서 내려다본 겐초지(建長寺). 일본 첫 번째 선종 사찰인 만큼 그 권위와 명성을 자랑한다. 사찰 건물은 에도시대에 중건됐다.
▲뒷산에서 내려다본 겐초지(建長寺). 일본 첫 번째 선종 사찰인 만큼 그 권위와 명성을 자랑한다. 사찰 건물은 에도시대에 중건됐다.

일본에서 고도(古都)라고 할 수 있는 도시는 몇 되지 않는다. 고도라고 하면 적어도 역사가 1천년 안팎은 돼야 하고 유적이 산재해 있어야 한다. 그 조건에 해당되는 곳은 교토(京都), 나라(奈良), 가마쿠라(鎌倉) 정도다. 한곳 더 꼽는다면 나라 인근의 아스카(飛鳥)가 있지만 유적이 별로 없다.

그 중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1192~1333년)이 있던 가마쿠라는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고도다. 도쿄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서울 인근의 강화도와 비슷한 곳이지만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유명 유적지도 그렇지만 옛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이 훨씬 더 고풍스럽다. 아마 경주보다도 훨씬 더 작은 도시(인구 17만5천명, 면적 39㎢)이기에 전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관광지로 뻗어나가는 데는 소도시로서의 한계가 적지 않은 듯했다.

◆신사와 절은 많지만…

가마쿠라는 온 동네가 절이다. 좁은 지역에 20여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있으니 더 자주 눈에 띈다. 가장 유명한 절은 겐초지(建長寺)다. 1253년 창건한 일본 첫번째 선종 사찰이다. 예전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현재 건물은 에도시대에 도쿠가와 가문의 지원을 받아 지은 것이다. 입구부터 웅장하지만 일본의 사찰이란 게 너무 비슷해 큰 감명이 오지 않는다. 중문 우측에 있는 일본 국보인 동종을 지나쳐 전망대가 있는 산으로 향했다.

계단을 따라 전망대에 힘겹게 오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그 앞에 가마쿠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곳에서 가마쿠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읽을 수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그 옛날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다. 산 줄기가 도시 좌우로 뻗어나가 바다까지 감싸고 있어 방어와 공격에 최적지임을 알 수 있다. 바다에 항구가 없다면 크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역일 것이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지역은 지평선이 보이는 대평원이다. 가마쿠라는 간토 평원의 동쪽 끝 산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기에 요새지로서 가장 적당했지만 현재는 그 같은 지형적인 여건이 큰 단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의 가마쿠라는 더 뻗어날 땅이 없기에 옛날 모습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가마쿠라 시청 문화재과 우다카 타케시(51)씨는 "지역이 협소하다 보니 관광코스 개발에 장애가 많고, 인구가 적어 중앙정부·현정부의 예산지원도 신통치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된 후 도쿠가와 막부(에도시대·1603~1867년)는 이 곳에 정치세력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직 사원과 귀족의 별장만 허용했다. 항구를 끼고 있는데다 간토 평야에서 이만한 요새지는 이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흥세력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왕의 별장이 남아있는 귀족도시로 남았다.

귀족도시로서의 품위는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서민들의 삶 속에 있었다. 가마쿠라 역에서 도심 쇼핑가로 들어서면 큰 건물은 없고 나무로 만든 작은 집,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꼭 드라마 세트로 만든 거리나 미니어처 세계로 들어온 듯하다. 전신주와 전깃줄이 이리저리 있는 것을 제외하면 100, 2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그곳에 사는 사람도 다 옛날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땅값이 비싸고 지역이 협소한 탓이 크겠지만 이것이 가마쿠라만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먹고 놀기에는 다소 불편

귀족도시인 탓에 물가가 너무 비싸다. 식당에 가면 점심 한끼에 1만엔 안팎의 메뉴가 즐비하다.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을 먹어도 3천, 4천엔은 줘야 한다. 도쿄 중심가보다 더 비싸다. 식당가에는 '고도(古都)의 요리'라는 팻말이 이곳저곳 붙어있는데 귀족적인 취향의 요리들이 나오는 곳이다. 보기는 좋고 맛은 무미건조한 음식들이어서 먹고 식당에서 나올 때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찾으면 보통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을 사먹는 것은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외국 관광객밖에 없다. 자연히 이곳에 머물다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밥값이 이럴진대 방값이야 오죽하겠는가.

지난해 1천900만명이 방문했는데 예전에 비해 관광객이 감소하고 있다는 게 가마쿠라 시청 관계자의 얘기다. 관광객 97%가 도쿄에 숙소를 정해놓고 하루 동안만 관광하고 돌아가고 나머지 3% 정도만 묵는 것이 큰 고민거리라고 했다. 묵어가는 관광객들도 초등학교 수학여행단이 많다.

가마쿠라 시청 고바야시 야스유키(45)씨는 "시민들은 관광객이 집안을 기웃거리는 걸 싫어해 많이 찾아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며 "오후 5, 6시면 가게 문을 모두 닫아 시끄러운 밤 문화도 없다. 이 때문에 관광객들이 머물지 않는다고 보고 시청에서 오후 늦게까지 영업해줄 것을 유도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총력전

가마쿠라시는 도시 전체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콘셉트는 '무가의 고도(武家의 古都), 가마쿠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무사'(武士) 이미지를 활용, 최초의 무사정권과 무사도의 의미를 현재에 살려내겠다는 구상이다. 가마쿠라 시청 관계자는 "영주와 귀족들에게 봉사하던 무사들이 자신들의 정권을 처음 만든 것도 이곳이었고 할복(割腹)의 자살의식과 검(劍)에 대한 숭배의식이 싹튼 것도 가마쿠라 시대였기 때문"이라며 "서양의 기사(騎士)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콘셉트가 강점"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홍보간판과 현수막이 내걸려있고 역과 버스주차장 등 공공장소에는 홍보전단이 비치돼 있었다. 7월 31일에 가마쿠라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는데 앞으로도 계속 열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현재 하코네와 가마쿠라가 경쟁을 하고 있는데 내년 초 정부에 의해 UNESCO에 제출할 후보지가 결정된다"며 "많은 성원을 해달라"고 했다.

'무가의 고도'의 핵심 유적지는 츠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다. 1063년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로 출발했지만 막부정권 성립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구획됐고 정치가 이뤄졌다. 현재 있는 신사 크기도 보통 신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복원 중인 본궁이 완공되면 대단한 위용을 보여줄 것 같다.

글:박병선 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가마쿠라 시대란?=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최초로 무사정권(幕府·바쿠후)의 본거지를 현재의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시에 설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리토모 가문은 경쟁관계에 있던 다이라씨(平氏)가문을 1185년 단노우라(壇の浦) 전투에서 물리친 후 교토에 있는 일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독자적인 정권을 세웠다. 1192년 일왕에게 세습적인 군사독재자 쇼군(將軍)으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1199년 요리토모가 죽은 뒤 막부의 실권은 쇼군의 섭정으로 있던 호조씨(北條氏)가문에 넘어갔다. 1272년과 1281년에 몽골이 2차례 침략해왔으나 태풍 '가미카제'(神風) 덕분에 물리쳤다. 몽골의 침략을 막느라 재정이 악화돼 체제 내부의 모순이 심화됐고 1331년 천황이 반란을 일으킨데다 파벌싸움이 잇따르면서 1333년 막부는 무너졌다. 그 후 가마쿠라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나 1603년 인근 에도(도쿄)에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귀족의 별장도시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인터뷰] 가마쿠라시청 학예사 나이토씨

#"가마쿠라와 경주는 장단점이 뚜렷하게 있는 고도이죠."

일본에서, 그것도 공무원에게서 한국의 경주(慶州) 이야기를 듣게 되니 무척 반가웠다. 지난달 말 가마쿠라시청에서 문화재과 학예사 나이토 히로유키(44·內藤浩之)씨와 고도 보존과 발전방향에 대해 2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경주를 대화 주제로 올리게 됐다.

그는 겸손한 일본인답게 가마쿠라에 대한 문제점부터 먼저 털어놨다. "가마쿠라에 박물관이 없어 큰 문제입니다. 현재 있는 미술관으론 외국인, 학생들에게 가마쿠라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요." 그는 "박물관 부지는 구해놨는데 예산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건립비용으로 50억엔 정도가 들어가는데 현재 15억엔 정도밖에 모아놓지 못했다"고 했다. 이로 인해 도쿄(기차 1시간 거리)와 요코하마(30분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변 도시임을 고려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갈 수 있다고 걱정했다.

2차례 경주를 방문한 적이 있는 나이토씨는 "경주에 국립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며 "외국인들에게 쉽게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주의 유적지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관광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라며 "볼거리가 있는 남산도 거리상 좀 먼 듯했고 유물이 군데군데 있어 보기에 불편했다"고 했다. 가마쿠라는 특색 있는 주택과 가게들이 자랑거리인데 반해, 경주는 특색 있는 주택과 가게가 많지 않고 도시 전체가 경주다운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그는 가마쿠라와 경주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했다. "규모가 작은 도시는 주민들의 힘을 모으고 사업을 추진하기 쉽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병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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