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는 변신중…도심 역사성만은 훼손말아야
6'25전쟁의 혼란시기에 수많은 예술인들이 대구로 몰려왔다.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최정희, 전숙희, 장만영, 김이석, 양명문, 정비석, 최태응, 박두진, 최인욱, 김윤성, 이상로, 유주현, 성기원, 이덕진, 방기환, 그리고 작곡가 김동진도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었다. 그들은 향촌동의'르네상스'와 '살으리'에 앉아 있다가 우수를 참지 못하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골로 드나들던 술집으로는 동성로 3가 해동라사 옆에 있던 '석류나무집'이나 향교 건너편에 있던 '말대가리집', 그리고 영남일보사 맞은편 골목 안에 있던 '감나무집'을 꼽을 수 있다.
피란살이에 찌든 문인들의 궁핍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합세하면 그렇게 궁상을 떨지 않아도 되었다. 육군본부가 대구에 자리 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다수 문인들이 종군작가단에 몸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다. 그 같은 자리는 구상 시인이 자주 주선하였는데, 당시 국방부의 기관지였던 '승리일보' 주간이자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향촌동에 모습을 나타내면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질 만큼 활기를 띠었다는 일화가 있다.
1970년 중앙로 네거리에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당시로서는 중앙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뒤이어 한일호텔, 로얄호텔 같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와 함께 대구 MBC와 CBS방송국, 국일따로국밥집이 이웃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8년 태평로에 있던 매일신문사가 남일동, 지금의 국민은행 대구지역본부 자리로 옮겨와서 1981년 계산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지역 여론을 선도했다. 한일호텔과 제일극장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앙로에는 이름난 양복점이 많이 있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영진양복점, 50년의 세월을 간직한 형제양복점, 1970년대에 문을 연 런던양복점, 그밖에 만우라사, 양치상 양복점을 비롯한 양복점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나 중앙로의 양복집에서 맞춤 양복을 해 입었지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그 시절 중앙로는 '시내'라는 말의 상징이었다. 흔히들 '시내에 간다'고 하면 중앙로에 간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중심가이자 번화가였으나 세월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 지하철 공사로 한동안 통행이 불편해지자 상권이 눈에 띄게 쇠락하였고, 주차공간마저 부족해 많은 상가들이 외곽지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 그뿐이랴. 2004년 2월 18일,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의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세월이 지나도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이자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아픔이었으며, 대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어처구니없는 참사라 하겠다.
근자에 들어 한일극장 맞은편에 대형 복합상가 건물 파티(PARTI : 스페인어로'당신을 위하여'라는 뜻)가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여러 개의 영화관과 외국의 유명 상표를 취급하는 가게들이 영업하고 있는데, 1천700여평의 대지 위에 지하 3층, 지상 9층 높이의 초대형 건물로, 도심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예전 명성사진관'삼성예식장'송민도산부인과'손두목 의원 같은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다.
이제 중앙로는 큰 변화를 꿈꾸고 있다. 차량 중심 도로가 아닌 보행자 중심 도로로 탈바꿈하기 위해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데, 다들 친환경 시설을 갖춘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행복을 누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같은 변화가 대구 도심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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