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31) 풍요의 상징 안계들

입력 2009-07-31 07:00:00

위천·낙동강의 '생명수'가 빚어낸 비옥함 가득

의성은 경북의 3대 곡창지대라는 안계들을 가졌다. 안계들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위천과 들 서쪽과 북쪽의 낙동강으로부터 수천, 수만년 생명수를 받아 의성 땅에 풍요를 주고 있다.
의성은 경북의 3대 곡창지대라는 안계들을 가졌다. 안계들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위천과 들 서쪽과 북쪽의 낙동강으로부터 수천, 수만년 생명수를 받아 의성 땅에 풍요를 주고 있다.
안계농협미곡종합처리장 직원들이 쌀을 생산하고 있다. 의성의 쌀은 예로부터 밥맛 좋기로 소문났다. 지금은 해외로까지 수출하고 있다.
안계농협미곡종합처리장 직원들이 쌀을 생산하고 있다. 의성의 쌀은 예로부터 밥맛 좋기로 소문났다. 지금은 해외로까지 수출하고 있다.

안계 들(평야)은 '지독하게'광활했다. 보현지맥과 팔공지맥에 둘러싸여 농사 지을 땅이 많지 않을 것 같지만 '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는 게 의성의 안계 들을 지칭하는 말일 게다.

경북의 중·북부지방은 들보다는 산이 많은데, 의성은 그렇지 않다. 의성은 산과 들이 공평했다. 의성의 서부는 '들', 동부는 '산'이다. 의성군 지도를 보면 놀란다. 지도의 서쪽은 거의 푸른 색(평야 표시), 동쪽은 황토 색(산)이다. 조선의 세종지리지에도 "기름지고, 메마른 땅이 반반"이라고 적었다.

일행은 의성처럼 절묘한 나뉨이 있는 시·군을 여태 본적이 없다. 더 넓은 들의 대표 선수는 안계·다인·단밀·단북·구천·비안 등 서부 6개면이다. 이들 면을 대표해 '안계 들'이라 통칭하고 있다. 실제로는 동부지역인 봉양과 금성면에도 들이 많다.

안계 들은 비옥했다. 그래서 경북의 3대 곡창지대다. 들의 한중간을 가로질러 의성의 젖줄인 위천이 흐르고 있고, 들의 서쪽엔 낙동강이 끝없이 안계 들에 생명(수)을 주고 있다. 갈수기의 고통도 사라졌다. 들의 북쪽에는 양서양수장이 낙동강 물을 끌어다 수로를 통해 들 곳곳에 보내고 있고, 들에는 저수지들도 적절히 자리해 '생명수'를 저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이야 관개시설이 잘돼 저수지의 중요성이 예보다는 덜하지만 옛 농사에서 저수지는 '어머니의 젖가슴'이었다.

옛 기록과 흔적을 보면 안계 들이 얼마나 광활한 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 이전인 삼한시대의 대표 못은 상주의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등이다. 이제 여기에 의성의 대제지를 넣어야 할 것 같다. 대제지(大堤池·큰 방죽)는 지금은 사라졌다. 안계 들의 들머리에 위치한 안계면 용기 2리 마을 앞에는 대제지유허비가 있다. 대제지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다. 기록에서 대제지의 규모는 '공검지, 의림지'급이다. 30ha(일부 문헌에선 60ha)규모에다 제방 길이도 1km가 넘었다. 8.15 광복 직전까지 존재하다가 지금은 농토로 변했다.

우리의 역사가 시작할 무렵부터 의성은 곡창지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안계 들에는 대제지급 저수지가 많다. 개천지, 효천지, 용암지, 조성지 등이 낙동강과 위천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의성의 쌀 재배면적은 1만1천668ha이다. 경북의 9%를 차지한다. 풍부한 물과 최적의 기후 조건 덕에 '의로운 쌀'과 '의성 황토쌀'등으로 대표되는 브랜드만 전체 재배면적의 33%다. 미곡종합처리장도 5곳으로 도내에서 가장 많다.

의성은 100년 전에 이미 안계에 금융조합을 설립했고, 1960년까지만 해도 농기구 제작소와 정미소 등이 있었다. 안계는 한때 양조장도 2개소나 운영됐다고 한다.

이처럼 의성은 풍요로웠다.

일행은 풍요의 상징인 안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일과 6일 열리는 안계장은 면소재지 장 가운데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장이다. 21세기의 안계장이었지만 옛 모습이 곳곳에 남아 여전히 정겨웠다.

한 일간지 기사를 통해 1939년 2월 어느 날 안계장의 모습을 엿봤다. "이웃 7개 읍·면에서 모여든 장꾼들이 2만명을 훌쩍 넘겼다.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내기와 묵 내기 화투판을 벌이고 있다. 여기저기 낮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는 이들, 흥정과 시비, 흥청거림과 떠들썩함, 순박한 농부와 세련된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내내 장터에 가득했다."

풍요의 또 다른 상징은 소다. 안계 들이 얼마나 넓었기에 농사를 감당해내기 위해 암소보다는 황소가 많이 사육됐다. 소는 지금의 농기계였다. 일제시대 안계 우시장은 조선총독부 지정 종모우(種牡牛)시장이었다. 전속 중개사만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종모우는 지금의 북한지방에까지 '의성우'라는 이름으로 공급될 정도였고, 모내기가 끝난 7월 성수기에는 하루 장에 나오는 소가 1천200여두가 넘었다고 한다.

안계 들에 지금의 풍요가 있기까지 수천년 인고의 세월도 있었다.

요즘 땅은 바로 돈이다. 땅은 예로 갈수록 그 가치가 높았고, 특히 풍요를 가져다주는 들은 '땅 중의 땅'이었다. 들은 때론 역사의 흥망을 좌우할 만큼 중요했다. 안계 들이 바로 그랬다.

안계 들은 그 옛날 삼국이 다툴 때 보물단지였다. 신라는 의성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의성의 뿌리인 조문국(금성면의 고대국가)을 멸망시켰다. 신라는 안계 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남하하는 고구려, 동진하는 백제 등과 안계 들 너머의 예천 삼강, 문경새재 등지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후삼국의 견훤과 왕건 역시 안계 들을 차지하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 안계 들은 평상시엔 나라의 살림이었고, 유사시엔 군수물자의 보고였던 것이다. 한편으론 역사의 주인공들의 땅 빼앗기에 의성 사람들의 고충은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역사는 들을 많이 가진 고장에 고통을 남겼다. 개화기 때 나라에서 세금을 은화로 납부하게 했다. 당시 청송의 심부자는 안계 들의 소유 전답을 처리하니 안계에 있는 돈이란 돈을 모두 거둬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안계 들의 땅 대부분이 타지인의 소유였다는 것이고, 의성 사람들은 그만큼 소작농이 많았다는 뜻이다.

옛날 임금들은 공을 세우거나 나라에 봉사한 관료들에게 그 대가로 땅을 하사했다. 대개 관료들은 농토를 받았다. 그러면 경북 중·북부지역 출신 관료들은 어느 지역의 땅을 원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안계 들을 많이 원했을 게다. 심 부자 이야기에서 보듯 안동과 예천, 상주, 청송 등지의 부자 양반들이나 향리들은 안계에 적잖은 땅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임금들은 관청 운영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역둔토를 둬 그 지역의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의성의 역둔토(약 610만㎡)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요즘 의성은 전국적인 명성에서 나아가 미국 등 해외에 쌀을 수출해 이름을 내고 있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쳤기에 오늘과 내일의 풍요가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종규기자 의성·이희대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 안종화 의성군 재산경영담당 김문진 의성군 문화예술담당

최신 기사